박윤주 개인전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 Your action is prohibited.

통의동 보안여관 2014.7.23 – 8.5 | 11 am – 7 pm
Opening 2014.7.25 6 pm

전시공간 보안여관과 본 전시의 연계성
기획/공간/관객의 상호 연결

‘개인이 가진 완전한 가능성으로부터의 희망과 그의 흔적으로서의 기록’ 을 증명하기 위하여 작가는 관객을 이 ‘개인’의 공간들로 끌어들여 개입시키고자 한다. 관객들은 방방의 문을 열거나, 직접적인 행위로 (키네틱적 설치) 작업의 기록과 변화의 현상을 유발함으로, 그 틈으로 고개를 넣어 그 안에서 진행되는 작가의 이 기록의 현장들을 목도함으로 단순히 일방적으로 작가가 개최한 전시를 관람하는 관객이 아닌, 직접 ‘개입된 행위’를 통하여 작가가 의도한 시공간의 체험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우리는 모두 ‘기록’을 만들어 내는 개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보안여관을 전시의 공간으로 선택한 또 다른 이유이며, 동시에 보안여관이 기획전시를 위하여 작가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_글. 박승예(작가, 기획자)

박윤주 작가노트
<집단과 개인사이의 건강한 긴장감>

시대는 여전히 집단의 지배하에 있으나 그에 굴하지 않은 체로 존재하는 ‘개인’ 이란 과연 무엇인가?

나는 집단과 개인 사이에 건강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법을 모색하고 가시화하는 작업을 한다. 개인의 독립된 자아는 집단에게 공공의 적이다. 자아를 내세우고 자기 판단을 신뢰하는 개인은 집단의 평화를 깨는 위험하고 거추장스런 존재로 간주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자고, 키가 작고, 미모가 뛰어나지 않고, 동양인이고, 힘이 세지 못하고, 어떤 소속 단체에도 동의하기가 힘들고, 섹슈얼리티의 분류법에 혼란을 겪고 있고, 결벽증과 편집증이 있고, 타고난 의심증으로 사람을 믿지 못한다. 그런 내가 예술가의 입장이 되면서 감성과 이성이 더 예민해지고, 나를 가장 크게 누르는 개념적 ‘적’이 누구인지 파악하게 된다.

집단은, 늘 반대편에 서 있는 벽이었다. 그 시작은 가족이었고, 다음은 첫 거대 사회 집단과의 만남이었던 학교였으며, 애인의 자기철학이었고, 예술계였고, 그리고 예술계를 포함하는 사회통념이었다. 그것들은 뛰어넘을 수도 없고 뛰어넘어보았자 딱히 나에게 이득이 되지도 않는 막힌 ‘벽’ 이었다.

타고난 결벽증과 편집증은 늘 집단 안에서의 당연한 과정을 방해하는 해충 같은 요소로 작용했다. 소수단체보다 더 소수로서 ‘개인’의 독특한 정체성을 추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마치 공자나 석가모니나 예수와 같은 우연과 필연의 우주적 합의가 있어야 일어나는 기적 같은 신비가 필요한 차원이기 때문이다. 결국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며, 우주적 합의점도 계승받지 못한 개인으로서의 나의 자아는 내적 영혼과 집단사회 사이에서 제대로 작용하지 못한 체 정체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혼의 분출과 자기창조 행위의 욕구로부터 생산된 이미지들은 우연히 ‘예술’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부산물들은 어쩐지 집단이라는 벽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기도 했다. 이 개인이 소속되지 않고도 온전히 유지되는 가능성 때문에 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업을 하면서, 집단이 주는 적의 가득한 무게를 늘 느낀다. 나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아직 내가 개인적 자아로써 몹시 불안정하며, 예술이라는 철없는 면죄부를 쓰고 있고, 한편으로는 아이러니 하게도 여전히 소속에 대한 욕구를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무게를 적당히 느끼며(또는 무시하며) 나의 원론적 영혼의 목소리를 자아를 통해 내뱉어 어쨌든 내 방식대로 생존해보려 하고 있다. 집단이 어떻게 개인을 컨트롤 하고 개인을 어떻게 집단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지에 대한 심리적 물리적 방법론을 가시화하고 행위하는 것. 그것이 당장은 내가 개인으로써 자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여기서 하나 덧붙이자면 개인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당면한 과제들이 진실을 열망하는 성숙한 개인들의 공동체가 아니고서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참된 개인들이 거대한 벽 없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것.
건강한 긴장감.

_박윤주(작가)

박윤주C.V
http://yoonjooo.blog.me/
yoonjooo@naver.com

Education
이화여자대학교 섬유예술/판화회화

AWARD & RESIDENCY
Triangle art association. New York, USA
Balum modern art centre, Berlin, Germany
Jaio contemporary art (visual art), Osaka, Japan
쌈지농부아트, 홍천, 한국
대안공간 스페이스 리트머스, 안산, 한국
SeMa 서울 시립미술관 신진작가 전시지원 공모 선정 2011

EXHIBITION
Solo Exhibition
2013 취약한 재단들: Venerable altars, 팔레 드 서울, 서울, 한국
2012 A Midsummer Night’s Dream, 갤러리 빔, 서울, 한국
2011 The Islands, 갤러리 빔, 서울, 한국(SeMa 서울시립미술관 지원)

Group Exhibition
2012
Republic production – 국회의사당, 서울, 한국
3sights. – 아센터브 갤러리, 베를린, 독일
Ma donna ,amore mio ‐ 갤러리 빔, 서울, 한국
2011
Beyond the five plots – 스페이스 리트머스, 안산, 한국
Wattashi6 – Alternative art studio bobo, 요코하마, 일본
Showcase exhibition – 스페이스 리트머스, 안산, 한국
WARARI2 – 쌈지농부아트갤러리, 헤이리, 한국
2010
< Stalking project> at Dumbo art festival. ‐Triangle art association, New York, USA
Buggurishitta ‐ Gallery jaio, 요코하마, 일본
Les Ombres errantes ‐ 대안공간 반지하, 대전, 한국
2009
Project; Ham or egg ‐ Hotel Balum, 베를린, 독일
One point six exhibition – 관훈갤러리, 서울, 한국
Discussion ‐Open studio ‐ 베를린 미술관 센터 밖, 독일
2008
Unlimited exhibition –갤러리 그림손, 서울, 한국
E‐debut. ‐ Ewha campus complex exhibition, 서울, 한국

박윤주 작가의 설치와 영상, 회화와 사진 등의 다양한 매체를 혼용한 작업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다양한 도구와 언어를 사용하여 질문하며, 전하고 있다.

“시대는 여전히 집단의 지배하에 있으나 그에 굴하지 않은 체로 존재하는 ‘개인’ 이란 과연 무엇인가?”

작가의 ‘집단’에 대한 이 ‘미시적 존재로서의 개인’ 으로서의 항변은 기실에 있어 희망을 포기하고 있지 않다. 모든 해답은 불꽃처럼 발생한 개개인들의 창의와 창조에 의하여 발생되어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는 벽을 긁으며 처연한 흔적을 남긴다. 거시적인 지구의 계획의 인과관계에 (“개인”이라는) 이 미시적 존재는 불가항력적 일 뿐이다. 저항은 불가하다.
무겁게 열리는 문은 오랜 시간에 걸쳐 벽과 바닥으로 그 끌림과 부딪힘의 흔적을 남긴다. 벽과 바닥은 온몸을 펼친 체 그 안으로 고스란히 그 흔적을 받아 담는다.

이 한시적이고 가변적이거나, 반대로 지속적인 ‘관계’의 흔적들은 때로는 상처로, 때로는 기록으로 그 역사를 남긴다.

관계는 공평하거나 동등하지 않다. 우주는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한다. 단지 ‘내’가 그를 이루는 편린에 불과하다. 종속된 자, 종속되고자 하는 자, 더 많이 사랑하는 자, 자식은, 부모는, 연인은 동등한 관계와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다.
거대한 것, 종속 하는 것, 거시적이며 중요하다고 치부되는 것, 다수의 것, 더 큰 권력의 것,

그들은 폭력적이다. 그러나 이는 폭력대신 ‘질서와 규범’ 이란 당위성의 언어로 칭해지곤 한다. 그것은 ‘거대 가치’의 절대성을 스스로 당연하게 부여한다. ‘모두’를 포괄하는 바운더리를 가진 것들은 당연한 규범과 질서정립의 권리를 스스로 획득한다. 그리고 그 안에 종속되어있는 (되어 있는 양 보이는) 이들의 순종을 의무화 한다. 그 안에서 우리들 (각각의 개인들)은 덩어리지거나, 혹은 저 혼자 일탈되어진 무수한 흔적들을 남기게 된다. 그것이 역사다.

바람의 방향과, 물리적 힘의 원리, 거시와 미시의 가치를 규정하는 집단에는 절대적 ‘가변성’의 공통점이 있다. 바람은 제각각으로 방향을 틀어 불며, 중력은 지구의 중심을 향하고, 집단의 가치는 당대의 이익에 따라 변화한다. 이와 동시에 그들의 존재가 부각되는 힘의 과시역시 동일하다. 그것은 순리와 질서라는 이름으로 당위성을 부여한 ‘통제’이다. 그들은 당연한 방향을 강요한다. 그 방향을 벗어난 움직임은 자연과 이치, 질서에 대한 도발이 된다. 즉각적인 제제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어떠한 역사와 공간속에서 온전한 ‘나’이기를 환영받아 왔는가? 데쟈뷰처럼 반복되는 제재는 늘 우리를 쫓는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에 굴종하지 않아온 개인의 ‘일탈’ 은 진화의 희망이 된다. 우리는 늘 그러하였고, 앞으로도 그러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