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현 개인전

《매복니 couch》

  • 일시: 2024. 7. 27. (토) – 8. 10. (토)
  • 장소: 아트스페이스 보안 2
  • 운영시간: 12:00 – 18:00 (휴관일 없음)
  • 입장료 무료
  • 오프닝: 7월 27일 (토) 17:00

Jonghyun Park Solo Exhibition

couch

  • Date : 27. Jul. 2024 – 10. Aug. 2024
  • Venue : ARTSPACE BOAN 2
  • Hours : 12PM – 6PM (Mon – Sun)
  • Free Admission
  • Opening Event: 27. Jul. 17:00

Credit 

⋩   주최/주관 박종현 Jonghyun Park

⊱   기획 서지원 Jiwon Seo

∰ 서문 서지원 Jiwon Seo, 이용재 Yongjae Lee, 문현정 Hyunjeoung Moon

∲   그래픽 디자인 이연석 Yonsok Yi

∷   설치 임재균 Jaegyun Im

⧱  설계 이세민 Semin Lee

  후원 서울문화재단, 하동철 재단

여기, 흰 벽이 있다.

서지원(기획자)

불현듯 흐릿한 취가 풍기고, 석회질 사이로 소리가 들려온다. 의중 모를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곳엔 기미가 있다. 행적을 알 수 없는, 그러므로 원인을 알 수 없는 동태다. 막힌 벽 앞으로 눈을 가져다 대곤, 생각한다. 이 무심한 면이 분명 무언가의 자취를 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이것의 배후엔 모종의 사건이, 혹은 사물이, 또는 누군가가, 눈을 부라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곧이어 우리는 깨닫는다. 기껏해야 한 뼘의 폭도 넘지 못할 이 육면의 개체 사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그러니까, 명백히 나선 이 냉담한 면을 제외하고서 우리는 결국 그 무엇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의 매복된 내부를, 사이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심연을-. 

  모종의 선택을 종용하며 그 깨달음은 냉정하게 제안한다. 기대와 가능성을 손아귀에 올려두고 내미는 수수께끼같이, 이것을 확인하거나 확인하지 말라며. 그리고 여전히 그곳에서는 어떤 소리가, 동태가, 취가, 넘어온다. 그것은 종종 울음이나 비명 같고, 어느 테러의 잔상이 뿜는 매연 같으며, 끔찍한 괴물이나 사라져가는 시체의 기척 같다. 그것은 속삭인다. “이곳에는 어떤 동인이, 내부에 들어앉아 우리를 노려보는 무언가가 있어.” 은신한 면들이 우리의 눈을 유인한다. 

  그렇다면, 나는 묻는다. 이 무색한 면을 파쇄한 이후 우리는 그 기미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단 말인가? 그곳엔 진정 심연의 모습이 은신해 있다는 이야기인가? 우리가 인식하는 무언가를 ‘심연과 실재’ 라는 이분된 단어로 가려낼 수 있기는 한단 말인가. 혹여, 그곳엔 사실 우리가 떠올리던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실재라 불릴 것도 없이 우리 앞에 드러난 순간 그 자체로 두 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있더라면….

실재와 실체, 그들을 명백히 부르는 와중에도, 간신히 배면만을 더듬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그 앞에서 감히 그것들을 지칭할 수 있을 만한 이름을 찾지 못하고, 그렇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징후와 배후. 심연과 은폐, 양가와 폐쇄, 이중, 모호, 징조, 오해, 오류, 섬뜩함unheimlich…. 재현과 이미지 앞에 늘 따라붙는 한 겹의 막과도 같은 말이다. 적어도 이곳에선 그렇다. 실재라 불리는 무언가와 이미지는 분명하게 다른 선상에 있을지언정 동시에 이를 재현 해내는 순간 분리할 수 없이 그 일부가 되기도 하므로. 폭풍, 그것은 불시에 다가와 시간과 공간 모두의 종적을 잃게 하는 폭풍과도 같다. 그리고, 박종현이 이미지를 마주하는 곳은 모든 것들이 선언되지 않은 채 뒤섞여버린 폭풍의 고요한 눈 속, 휘몰아쳐 뭉개지고 있는 그 날개의 발원지, 도처이다. 그곳에서 여타의 이름 모를 심상들은 예지나 기류가 불시착하듯 그의 앞에 드러나고, 그는 이들을 매만지며 다시, 해석한다. 때로는 연고 없는 배우의 얼굴로, 연극의 한 장면으로, 영화의 스틸이나 가면 또는 어느 날 그가 목도했던 유년기의 바랜 종이와 가죽으로 말이다. 그들은 모두 경위 없이 그에게 찾아온 것들이다. 예고도 망설임도 없이, 마치 한밤중의 올빼미처럼…. 

그럼에도, 올빼미 같은 심상들의 무표정함과는 다르게 그의 해석 안에는 분명 어떠한 표정이 존재할 것이며, 표면의 밑 그 언저리에는 그의 동인을 반사하는 지표들이 깔려 있으리라. 하지만, 그는 일련의 인지를 청소한다. 붓질을 밀어내고, 이야기를 소거하며, 평평하게 깔린 심연 안으로 사라지도록 한다. 가령 그가 어느 날 경유 했으리라 보이는 쇼파를 무심히 걸어두며 그것의 이름에서 라는 이의어를 유희하듯이, 그는 유예한다. 폐허와도 같은 으스스한 풍경들, 이를테면 이념과 연루되어 들려오는 전쟁이나 테러의 소문들 앞에서 느끼던 외상을 자신의 근처로 이끌어 오다가도, 그는 얇은 층 아래에 깔린 자신의 얼굴이 드러나기 직전 은닉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이는 일종의 유예이다. 휩쓸려 다가온 폐허의 으스스함 또한 과잉된 환상의 찌꺼기들일지도 모르므로. 그는 노골적이리만큼 이중성을 환영한다. 불가피한 이중성이다. 그가 재현 해내는 이미지는 그리하여 때론 지표 같고, 동시에 무자비한 허상 같으며, 그것의 형상은 껍데기 자체로 보존되다가도, 왜곡과 굴절을 거쳐 틀 안에 안착되어 피학적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내려놓는다. 그 표면은 이야기한다. 서늘하게 우리를 응시하면서. 이 얇은 표피 아래에, 무언가 있지 않겠느냐고. 자비로운 선택권을 주기라도 한다는 듯이. 선택권을 준다는 것은 사실 그가 우리를 자신의 공백 속으로 집어 넣었을 때 가능해지는 일이기에, 그의 회화는- 가학적이다. 그는 그렇게 이제는 자신의 것들로 포섭한 이미지들을 진열한다.

그러나/그러므로, 다시 돌아와,

설령 우리는 그 냉담한 면을 부수게 되더라도 끝내 원하던 것을 마주하게 되지는 못할 테다. 기대는 무한한 배신을 향유하고, 우리가 원하던 것은 사실 부서진 단면 사이로 드러난 무언가가 아닌, 은근한 취를 풍기는 매복된 ‘그것’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마치 입술 사이에서 슬쩍 드러나던 베러니스의 가지런한 치아의 환상처럼. 그러니, 은신 그것은 그저 공포다. 도처에 매복된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혹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 얼굴을 체화한 공포. 우리는 어쩌면 그것이 계속해서 풍기는 환상에 시달릴 것이다. 그곳을 두드리고, 귀를 가져다 대고, 덮인 면을 의심하면서. 이 과정들을 번역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소거된 붓질 앞에선 불가해한 번역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번역은 그 자체로 오류이며 오류는 때론 필수적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겐 여러 갈래의 길이 열린다. 선택할 수 있다는 듯이. 그것은 무색하게도 닫힌 벽이다. 우리는 미로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서문 발췌

실재와 실체, 그들을 명백히 부르는 와중에도, 간신히 배면만을 더듬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그 앞에서 감히 그것들을 지칭할 수 있을 만한 이름을 찾지 못하고, 그렇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징후와 배후. 심연과 은폐, 양가와 폐쇄, 이중, 모호, 징조, 오해, 오류, 섬뜩함unheimlich-. 재현과 이미지 앞에 늘 따라붙는 한 겹의 막과도 같은 말이다. 적어도 이곳에선 그렇다. 실재라 불리는 무언가와 이미지는 분명하게 다른 선상에 있을지언정 동시에 이를 재현 해내는 순간 분리할 수 없이 그 일부가 되기도 하므로. 폭풍, 그것은 불시에 다가와 시간과 공간 모두의 종적을 잃게 하는 폭풍과도 같다. 그리고, 박종현이 이미지를 마주하는 곳은 모든 것들이 선언되지 않은 채 뒤섞여버린 폭풍의 고요한 눈 속, 휘몰아쳐 뭉개지고 있는 그 날개의 발원지, 도처이다. (글/서지원)

‘구분 짓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연결을 위해 존재하는 이분법’, 혹은 ‘기존의 이분법이 더 이상 그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얘기하기 위한 이음새’들로서 모든 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 이 전시를 아우르는 전제다. 전시의 각 요소들은 아주 유기적이라서, 부분을 서술하려고 하면서도 전체의 전제를 경유해야 하기 때문에 나의 단어들은 결국 무색해진다. (글/이용재)

방처럼 또는 미로처럼 연출된 전시의 구성은 회화와 이미지를 마치 단서처럼 늘어뜨리고,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그것을 탐험하고 해독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기이한 구조는 여러 해석과 번역의 여지를 열어둔 채 집단적인 오독을 초래하기도 할 것이다. 나열된 이미지는 많은 것을 말하고 있기도,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 근대 문학과 고전 희곡, 그리고 현대시를 경유한 방의 구조는 해석에 복잡성을 더한다. 작가는 이야기한다, 그것들이 나에게 그려줄 것을 종용하였다고. 그렇다면 이를 마주할 것을 종용당한 관객에게 묻고 싶다. 파열된 표면에서, 말하지 않는 이미지에서, 당신은 무엇을 발견하고 있는가. (글/문현정)

*서문 전문은 하단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이용재

짧은 글을 쓰기로 하고, 여러 글을 건네받았다. 오래 읽고 생각하다가, 나는 부분을 세밀하게 서술하는 것으로 하나의 갈래를 맡으려고 한다. 다만 전시에 귀속되면서 이 문장은 이상해진다. 전시에 기반하는 커다란 전제는 흔히 사용되는 이분법을 이상하게 만든다. 반대라고 여겨지는 단어들은 닿아있다. 쉽게는 하나의 그림 속에서 비유가 된 것(가짜)과 비유하고자 했던 것(진짜)(인조 가죽에 그려진 소파-그림과 가죽 소파)이 닿아있다고 읽을 수 있고, 작품과 작품 사이에서 실재와 환영(비스듬한 면을 가진 틀에 매인 소파 가죽과 소파의 유령)을 얘기할 수 있다. 나아가 대상으로서 자신과 관찰하는 자신, 다시, 더 극단적으로는 진실/진정함과 그게 아닌 것 등이 예시가 된다. 그리고 결론나지 않으며, 연쇄를 이룬다. ‘구분 짓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연결을 위해 존재하는 이분법’, 혹은 ‘기존의 이분 법이 더 이상 그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얘기하기 위한 이음새’들로서 모든 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 이 전시를 아우르는 전제다. 전시의 각 요소들은 아주 유기적이라서, 부분을 서술하려고 하면서도 전체의 전제를 경유해야 하기 때문에 나의 단어들은 결국 무색해진다. 건네받은 여러 글 중 논문 하나가 정확히 그런 구조를 설명하는 것이었다.(김재인) 논문을 다 읽고 나서, 나는 필자의 시간관을 알게 되었지만, 시간을 설명하기 위해 쓰인 단어들은 뒤섞여서 아무 의미도 없어졌다.

뇌는 매 순간 효율을 따지기 때문이다. 압축하지 않거나 두 개 이상의 축을 만들어 사고하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이 전시는 어떤 부분에 집착해도 좋다고 얘기하지만, 확실히 어렵게, 더 넓은 영역을 치밀하게 확보하고 있다. 부분과 전체라는 단어를 헷갈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분을 말하는 듯, 전체를 가늠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다시 분명히 부분일 수 밖에 없었음을 발견하는 연쇄 작용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선 쓰는 나를 향한 것이고 짧은 글을 위한 것이다. 부족하게 다루며 더 방대한 영역을 환기하는 일을 해내야 하고, 내가 그러지 않을 수 없었음을 설득해야 한다. 아래는 세밀한 읽기의 시작이 될 수 있는 여러 지점이다. 짧은 글에 그치기를 실패하게 만든 지점들이다. 위의 전제와 전시-독해의 결과를 생각하면 이것들은 굳이 문장 속에 있을 필요가, 순서가 있을 필요도 없어 보인다. 모든 문장은 양방으로 뻗어나가 나머지와 이어지며 커다랗게 변했다.

  • 박종현은 최근에 함께 일하며 내가 느낀 섬뜩함에 대해 안다. 그리기가 너무 빠르고 정확해서, 또 일의 양이 많아서 나는 조금 무서웠다. 가벼운 웃음이 날 정도로, 보란듯이 건넨 여러 글 중 하나는 제목이 “unheimlich”이었다.
  • 송화기는 아닌, 수화기의 기능만을 가진 전화기 그림은 올빼미가 그려진 그림과 제목을 바꿔봐도 잘 읽힌다.
  • 나는 올빼미의 눈두덩이를 그린 크림슨-붓질을 통해 어떤 온도나 촉감을 체감할 수 있다가도, 그저 까맣게 칠해진 면 위에 무심하게 얹힌 광채(눈)를 보면서는 좀 무기력해졌다. 명백하게 모니터를 경유한 도상이라는 정황 역시도 나를 그렇게 만든다.
  • 버드아이뷰를 통하는 태풍의 눈은 정말 ‘눈’처럼 그려졌다. 동세가 나타나는 온갖 영역에서 다른 그림과는 다른 뉘앙스가 흠결처럼 드러나있다.
  • 대체로 그림은, 결국 자신을 마주했던 그 이미지가 그 자신이기도 했다고 얘기한다. 치밀한 구성이라서, 기만적으로 느껴지는 구석이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화가로서 너무 자연스러운 얘기라, 오히려 그렇다. 그저 뒤섞지 않고 낱낱이 구성했기 때문에 치밀하다. 그걸 뒤섞을 사람은 나, 혹은 불특정의 관객이다.
  • 상대적으로 과정이 잘 드러나있는 연극 배우-그림은 사후에 막(망)이 씌워진 상태다. 반면 과정에 대해 들었는데도 어떻게 그려진 것인지 전혀 모르겠는, 소름끼치도록 사실적인 이미지인, 영화 배우-그림은 막에 함께 그려졌다.
  • 집중은 곧 외면이다. 잊고자 하는 영역을 정확하게 잊어내야만 한다. 그래서 에드가 엘런 포에 대한 언급, 어떠한 집착에도 열려있다는 식의 설명은 어딘지 기만적인 구석이 있는 친절함으로 다가온다. 꼬여있지만 치밀하게 닫혀 있는 미로, 그것을 굽어보는 새(오감도)가 이를 방증한다.
  • 그러니까 이 전시는 여러 연쇄에 대해 알고 있는 본인을 위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이해에 가독성을 더하여 풀어놓은 것이다. 박종현은 붓질을 “청소”라고 표현했고, 그럼 대체 붓을 떼고 나서 무얼 느끼냐는 질문에 “잠시 고요함”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리기는 마치 어떤 수식-이론의 첫, 두번째 검산, 증명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수학자는 증명을 확인하며 안도감을 느낄 수 있고 그걸 좋아할 수 있지만, 단지 그 느낌이 좋아서 계산한다고, 그래서 자 신이 수학자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박종현은 그림을 통해 무언가 확인하고 다른 그림(수식)과의 연결을 통해 지도(이론)을 갱신할 때까지 잠시 안도할 시간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잠시 연구 목표를 뒤로하고 현상을 ‘관찰할’ 시간이 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보여주면서 동시에 무언가 보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 이 전시는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제안서의 “묵시룩적”이라는 표현은 ‘불가해함’과 닿아 있는 것 같은데, 그 불가해함이란 이해할 수 없음이라기 보다는 단어의 부족함, 기성의 접근법이나 표현의 부적절함을 말하는 것이다.

I, II, III, IV, V, VI, VII, VIII, IX, X

문현정 (독립 큐레이터)

“이미지는 한 밤 올빼미처럼 불쑥 찾아와, 나에게 자신을 그려줄 것을 종용한다.”

– 박종현 작가노트 중

박종현은 이미지가 그에게 행사하는 막강한 힘에 대해 말했다. 이를 증명하듯, 그의 회화에는 매번 명확한 대상과 사물이 등장한다. 매복니, 올빼미, 오래된 소파, 노란색 전화기. 작품에 드러나는 이미지는 구체적인 레퍼런스를 전제로 하기에 얼핏 보았을 때 구상적이거나 지시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는 마치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려주지 않기로 결정한 것처럼, 그것을 보기 위해 집중한 시선을 표면에서 미끄러지도록 만들어 버린다.

III. 

구상 회화에서 이미지는 형상을 재현하거나 서사를 묘사하기 위한 질료로 기능해왔다. 그런데 명확한 구상처럼 보여지는 박종현의 회화에서 이미지는 상징을 향해 움직이지 않으며 구체적인 서사를 담보로 하지도 않는다.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파고들수록 미궁에 빠지게 만드는 모순적인 서술법은 일종의 징후적 이미지를 발현해낸다. 환상적인 것, 은폐된 것 — 낌새나 뉘앙스, 조짐과도 같은 것이다.

이미지와 형상, 화가와 캔버스 사이의 관계적 성질을 고민하는 그의 회화에서, 이미지는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다가온다’. 그는 서술하기 위한 목적으로 형상을 그려내지 않는다. 그의 회화가 무언가를 재현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재현하는 사건이나 진술은 배제된 상태로 마무리된다. 내러티브가 부재한 회화는 모호한 얼개를 토대로 병치되어 또 다른 서사를 추측해 볼 것을 유도하고 있다. ‘Image — After — Narrative’. 역추적을 요구하는 그의 회화는 수평적 구조 위에 나열되어 모종의 관계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박종현은 이미지를 ‘선택’된 것으로서의 피동에 위치시키는 것이 아닌, ‘행하는’ 것으로의 능동적 위치에 자리하도록 만든다.

그의 손은 거침없이 캔버스 위를 움직이다가도 곧바로 작가적인 제스쳐를 지워내는 과정을 거치며 밋밋한 표면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작가가 회화에 관여했음을 암시하는 회화적 흔적은 유실되어 버린다. 행위의 궤적을 덜어내는 일련의 과정은 평평해진 화면 아래 무수한 기억과 감각의 공간을 숨겨내고 있다. 결과적으로 가장 바깥쪽에 드러난 형상은 파편화된 언어와 말, 붓질을 감추어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이름 모를 심상이나 불길한 기류, 잠재적인 의식을 감각하도록 이끌고 있다. 이로써 도상이 그려진 회화의 면은 환영의 공간을 만들어내지만, 다시 그 환영을 고발하는 화면으로 작동한다는 아이러니를 가지게 되었다.

VI.

그가 그려내는 형상은 다큐멘터리 사진부터 무빙 이미지의 스틸컷, 주변부의 사물까지 그 근원을 다양하게 한 채로 혼재되어 있다. 그중에는 테러나 폐허의 풍경에서 기인하는 이미지가 섞여있다. 작가의 개인적 기억을 소환하고 있는 이미지는 때로 외상적으로 다가옴으로써 섬짓한 심상을 발현하기도 한다. 911 테러를 그려내던 종이를 옮겨낸 ‹쌍둥이›(2023)와 유년 시절부터 오래 함께한 소파의 ‹Couch›(2024)가 그것이다.

VII.

박종현의 회화는 무언가를 서술하는 동시에 은폐한다. 그것이 서술하는 이미지는 가장 직설적인 형상으로 드러나되 납작한 표면 아래로 가려내어짐으로써 매복된 함의를 가진다. 명확한 대상을 재현하지만, 그럼에도 지표적으로 작동하는 이미지. 의미를 담기 위한 그릇에서 벗어나, 의미 그 자체로 구실하게 된 기호.

VIII.

서사는 이미지를 통해 물화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사를 말하기 위해서 이미지는 물화된다. 회화 속의 형상은 시각적 단서를 제공하기 위해 유물적 조건으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박종현은 물화된 이미지를 역으로 이용하여 캔버스와 구상의 관계를 전복시킨다. ‹Couch›는 그가 오래 함께했던 가죽 소파의 표면을 벗겨내어 캔버스를 대체하도록 만들어버린 작품이다. 여기서 회화는 만질 수 있는 것에 더 가까워진다. 이미지의 지지체가 되기 위에 존재했던 캔버스와 프레임은 가죽으로 덮어 씌워짐으로써 더 이상 지지체가 필요하지 않은 화면이 되었다. 캔버스의 물리적 조건을 변용한 가죽-캔버스는 재현의 대상이 되었어야 했을 사물의 표면을 고스란히 옮겨내어 회화적 흔적이 아닌 외상적 흔적을 간직하고 있으며, 직관적으로 대상을 재현하는 표면이 됨으로써 가장 물화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IX.

전시는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와 ‘베레니스’, 그리고 이상의 ‘오감도’를 소환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까지.) 여러 개의 거대한 서사처럼 전시를 에워싼 벽은 마치 서사의 골조나 형식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이고, 또 작품 일부 역시 이에 조응하는 것처럼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각각의 이미지는 독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다시 파편화되기 때문에 전시를 관통하는 대서사를 상상하는 행위를 좌절시켜버리고 만다.

X.

방처럼 또는 미로처럼 연출된 전시의 구성은 회화와 이미지를 마치 단서처럼 늘어뜨리고,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그것을 탐험하고 해독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기이한 구조는 여러 해석과 번역의 여지를 열어둔 채 집단적인 오독을 초래하기도 할 것이다. 나열된 이미지는 많은 것을 말하고 있기도,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 근대 문학과 고전 희곡, 그리고 현대시를 경유한 방의 구조는 해석에 복잡성을 더한다. 작가는 이야기한다, 그것들이 나에게 그려줄 것을 종용하였다고. 그렇다면 이를 마주할 것을 종용당한 관객에게 묻고 싶다. 파열된 표면에서, 말하지 않는 이미지에서, 당신은 무엇을 발견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