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성 개인전
《카우보이》

  • 일시: 2023. 07. 28 – 08. 20
  • 장소: 아트스페이스 보안 3
  • 운영시간: 12:00 – 18:00
  • 매주 월요일 휴관
  • 입장료 무료

Eusung Lee SOLO EXHIBITION
Cowboy

  • Date : 28. Jul. 2023 – 20. Aug. 2023
  • Venue : ARTSPACE BOAN 3
  • Hours : 12PM – 6PM
  • Closed on Mondays
  • Free Admission

Credit

  • 글/ 김진주
  • 협업/ 소민경 (<약사여래입상>)
  • 도움주신 분들/ 강지호, 박고운, 이유진, 정성진
  • 감사한 분들/ 김진주, 박승혁, SolDonna, 송세진, 이충현,추성아
  • 주최.후원/ 서울시립미술관 (2023 신진미술인 지원 프로그램)
  • Text by Jinjoo Kim
  • In gratitude of Seunghyuk Park, SolDonna, Sejin Song, Choonghyun Lee, Sung-ah Serena Choo, Jiho Kang, Jinjoo Kim, Goun Park, Jane Lee Mason, Seongjin Jeong
  • Collaborated with Minkyung So for
  • Organized and Supported by Seoul Museum of Art (Emerging Artists · Curators 2023)

“카우보이”(아트스페이스 보안 3, 2023.7.28-8.20.)는 이유성의 세 번째 개인전으로, 인체의 상징과 형상에 대한 탐구로 작업적 폭을 넓힌 결과다. 작가는 실존하는 타인의 몸을 석고붕대를 주재료로 떠낸 다음 그 틀을 자르고 봉합하고 다시 세운 입상 다섯 점과 자신의 몸 부분을 셀프로 본뜬 알루미늄 파편을 불완전하게 재결합해 뉘어놓은 조각 설치 한 점으로 이 전시를 구성했다. 그의 전작을 주로 구성하는 사물의 이미지를 놓고 보면―이전에 참여한 단체전[1]에서 부분적으로 신체의 동세를 조각하거나 사물의 신체성을 탐구했던 적이 있긴 하지만―이번처럼 실제 인체의 형태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게다가 전신을 구현하는 방식은 생소한 방향의 시도이다. 그래서 이유성의 작업을 이미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 전시의 인간 형상들이 배반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배반은 보는 이의 착각이다. 작가는 언제나 작업의 반경에서 자유로울 창작자로서의(이 또한 인간이라는 개념에서 작동하는) 권리를 가지며, 또한 작가가 직접 전시 제목으로 붙인 이 ‘카우보이’가 ‘배반’의 성질을 익히 드러내 유희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닮는다는 것은 그래서 늘 흥미롭다. (비인간, AI 시대가 도래한 지금에도 그렇다.) 인간에 대한 상징화는 유형화의 기제이면서 또한 그 속성을 뒤튼다. 전형적인 카우보이의 형상[2]은 남성 신체의 수직성과 운동력에 기반한 개척자상을 지도해 왔지만, 이 개척자는 가부장처럼 가족 권력을 생산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옛날의 목동처럼[3] 마을을 수호하나, 대게 황야의 바람 속 모래 알갱이처럼 무리와 섞이지 못하고 서걱거리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 외로움 속에서 퀴어함으로의 전환이 일어난 여러 변칙적 인물을 우리는 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봐왔다. 그리고 이제 그 변칙마저 하나의 유형으로 해석되고,[4] 뒤집어진 속성은 중년 남성배우를 ‘베이비걸’[5]로 칭하는 것으로까지 번져간다. 그런데, 전해 들었던 대로 조각가를 ‘카우보이’라 부르는 표현도 이와 같을까?[6] 어쨌든 카우보이는 딱 이탈하지 않을 정도로만 개체를 가이드하는 중간자, 구속하지 않는 파수꾼, 또는 표박하지만 힘을 가지는(이 두 성격의 선후를 역방향으로도 작동하게 하는) 인간형이고, 이 전시에서―시간에 따라 쌓인 문화적 사용 가치의 속살을 파내고 남은 공백처럼―그러한 원형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은 작품 하나하나와의 연관성은 의도적으로 결여하지만, 이 전시의 인간 형상들의 공존을 엮어낸다. 전작에서 이어지는―사물의 고정적 시각을 반으로 갈라 그 이물성을 접합하고, 외부의 구조가 속살을 파고들게 하는 등 그 핵심에 ‘배반’이 있었던―작가의 개성에 충실한 논리[7]로 보자면, 사물-작품으로서 한 개체에 적용되었던 ‘배반’은 ‘카우보이’로 말미암아 이번에는 전시 전체의 관점을 통과하는 범주로 확장된다. 

한편, 카우보이는 대적하는 동세를 연상케 하니, 이번 전시에서 그가 겨냥한 자리에 무엇이 있다고 상정한다면 그것은 ‘껍질’이 되어야 할 것이다. 대체적으로 하얀, 수채 물감이 간간히 덧씌워 있지만 그 조차도 백색의 표면 입자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동시에 반대로, 격자 질감이 색을 머금고 있는) 중간적 상태로, 구멍은 다 채우지 않고, 안과 밖, 정면과 후면이 뒤바뀐 채, 속이 빈 채로도 잘 서 있고, 어떤 것은 그리 두껍지 않은 철사 뼈대로 지탱하고 있는 다섯 개의 인체 형상 껍질들이 관객과 마주한다. 작가가 이 껍질을 떠내기 위해 거쳤을 과정을 그려본다. 근육이 꿈틀대고 땀구멍에 액체가 생겨나는 그 몸, 그 피부에 재료를 밀착시켜야 한다. 이렇게 촉각을 떠올리게 하는 이유성이 만든 몸 이미지인 ‘껍질’은 사물로서는 피부가 아니지만, 피부의 이미지를 필연적으로 소환한다. “신체를 하나로 묶어주고 인간이 직립할 수 있도록 지탱해주며 외부 공격들에 대항해서 신체를 보호하고, 자극들과 유용한 정보들을 포착하고 전달”[8]하는 피부는 정신분석학에서 자아를 형성하는 기제로서 중요하게 포착되었고, 이는 디디에 앙지외에 의해서 ‘싸개’로 개념화된 바 있다. 그런데 왠지 이유성의 인체는 분명히 피부도, 확장된 피부인 싸개도 아니다. 보호할 자아가 사라진 ‘껍질’일뿐이다. 가까운 것을 찾는다면―“디지털 살갗”과는 무관한 표준적 형상의 몸이긴 하지만―“포털과 통로”를 열어주는 “세상이자 상처”로서의 피부에 가까울까.[9] 이 지점에서 이유성의 조형 언어이자 질료로서의 ‘껍질’은 보호장벽으로서의 싸개나 생물학적 결손을 복구하는 의미를 상기시키면서도 파열한다. 

껍질에 남은 것은 구멍과 표면이 공존하는 감각 경계인 피부를 통해 접촉이라는 비언어적 관계가 형성되었던 흔적이다. 작가의 손이 타인의 살갗 위를 연신 두드리고 문지르고 덮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석고붕대는 마르는 시간이 짧고 자칫하면 눌려 우그러질 테니, 어느새 몸을 싸는 동작은 재빨라지다가도 피부의 작은 요철과 털 하나에도 쉽게 멈춰 섰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 꿈틀대는 것을 가만히 감싸 안았던 것은 어느새 틀만 남기고 몸은 고스란히 남긴 그 형태에서 쉽게 빠져나갔을 것이다. 이렇게 남은 ‘껍질’은 무너지고 부재하는 몸의 자국이 되었고, 마치 퍼포밍 없이 수행문이 되기 위한 가능성으로서의 몸, 그 조형적 가능성을 추적하듯 남아 있다. 어쩌면 이 껍질은 유령으로서의 몸 이미지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유령’의 차원에서 말하지 않았기에 순전히 보는 이의 상상이지만, 이 하얀 몸체는 자동적으로 아감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해 말했던, 기억하는 무언가를 새겨 넣을 수 있는, 떼어낸 후에도 흔적이 남게 되는 밀랍, 그리고 그 껍질 안에 있었을 영혼적 존재를, 그가 유인하는 깨달음을 상기시킨다.[10] 이 껍질 안에 몸을 기꺼이 내준 이들의 인간적 특질, 살과 뼈, 사회적 관계가 비동시적으로 공존함을. 

이유성의 껍질 인체 조각의 바탕이 된 석고붕대는 색과 형태, 질감면에서 특이할 것이 없다. 게다가 주로 간이로 형태를 뜰 때 쓰이고, 내부의 신체 골조의 결함을 재생하고 나면 곧장 폐기된다. 물질의 지위로 보자면 부차적인 형편이 당연하달까. 물이 닿으면 흐물거릴 테고 힘을 줘 누르면 금방 부서질 테다. 조각적으로는 난점 가득한 재료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이 재료가 가진 일회용의 무개성은 인체 형상에서 기호를 탈각시켜 “가치 구분이 무른 공간으로 감각”[11]하게 하려는 작가에게는 최적의 선택이 된 것 같다. 이유성은 이 시점에서 인체 조각으로서 배반적인 선택을 하나 더 예비해 놓는다. 이번 작업을 위해 그가 탐구한 인체 형상은 석고붕대가 주는 임시성과 전혀 다른 시공간의 전형성을 내포하는 것들이다. 도나텔로의 다비드상, 비욘세의 퍼포먼스와 의상, 바티칸 박물관의 천사상, 불교 전통의 약사여래상, 앙리 마티스의 ‘등’ 부조, 미라의 관이 이 껍질들의 유령적 원형이었던 것이다. 이어서 작가는 한번 더 자신의 선택을 배반한다. “퇴행적으로 비칠, 현대적 조각 측면에서는 한계가 될 수도 있을 하드웨어로서의 몸이 가진 세분화된 조건”을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정보값”으로 치환해 “리사이클링”하고 “해킹”한다. 조각적 규범으로서의 이 인체 형태들은 실존 인물의 몸과 겹쳐져 ‘껍질’로 캐스팅되는 과정에서 수수께끼처럼 반영되거나 지워져 섹슈얼리티, 그로테스크, 성상 파괴, 약물로 인한 표피의 전율, 추상화된 공간과 같은 변성의 사건과 감각을 산출한다. 

이제 세워진 타인의 몸들과 대조적으로 바닥에 늘어뜨린 몸이 남았다. 작가 자신의 몸을 셀프 캐스팅해 이어 붙인 이 알루미늄 파편 조각들을 떠올리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이유성의 인체 조각은 작가 자신이나 규범적, 프로타고니스트로서의 자아 탐구라는 대다수 조각의 전통에 비추어 다른 선택을 하고 있다고. 이 ‘껍질’들은 그저 “생기를 얻었다가 다시 비활성 상태로 돌아가는 물질”[12]일뿐인 ‘몸’으로서의 인간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말이다. 이유성이 택한, 석고붕대로 몸을 둘러싸는 방식은 시체를 미라로 봉인하거나 데스마스크를 만드는 과정과 원론적으로 유사하다. 이렇게 존재가 소거된 후 발생되는 몸, 즉, 죽음 이후의 몸 또는 사물로서의 신체의 문제를 건드린다(이 또한 피부를 상기시키며 접촉한다). 시체는 물건이기에 성스러움을 가진다고 했다. 그리고 살아있는 인체 또한 물건의 범주에 들어갈 때 역설적으로 우리가 신체에 대한 권리를 견고한 토대 위에 정초할 수 있다.[13] 애초에 ‘껍질’이라는 조형은 작가가 작업실을 방문한 가까운 친구들의 손, 발, 얼굴을 가볍게 떠내봤던 “사소한 의례”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번 전시에서 한 사람의 신체 구조와 행위 조건에 바탕해 몸 이미지를 조각내는 작업 언어가 되었다. 파편이 된 몸은 전신과 비교했을 때 전인성보다는 사물로서 몸을 인식하게 한다. 인격적인 것을 상실했을 때, “그렇게 만들어진 텅 빈 껍질”로서 몸의 가치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글/ 김진주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1] (2022, N/A, 기획: 예뻬 우겔비그), 기획전 <트랜스포지션> (2021, 아트선재센터, 기획: 김해주), 소민경x이유성 2인전 <대사관> (2021, 카다로그 스페이스)에서 전시했던 작품 대부분은 인간의 신체를 재현하고 있지 않지만, 어떤 신체적 특성(체적, 뼈대, 동세)으로 읽힐 수 있는 요소를 가졌다. 다만, 진짜 인간의 형상이 등장하는가 아닌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할 지점이기에 작가가 신체적 탐구를 선행하고 있었다고 증거로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2] 너무 뻔한 묘사이지만, 떠올리면 떡 벌어진 어깨너비 A자로 단단히 세운 남성 신체, 그 수직의 정점에 놓인 서부의 바람을 품은 듯 유려한 곡선의 모자와 양 바지 주머니 춤에 걸쳐있는 총기가 만드는 복식, 말등에 올라타 정조준한 눈빛 같은 것이다. 

[3] 예수 또한 목동이었다. 예수의 외양을 카우보이로 바꾼 짤을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4] 퀴어 카우보이에 관한 연구로 이 책 Chris Packard, “Queer Cowboys”(Palgrave Macmillan, 2016)을 발견했다. 대중문화에서 퀴어 카우보이의 등장에 관해서는 이 기사를 참조. C.S, Harper, “Why the cowboy has always been queer as folk in pop culture,” May 23, 2023, Alternative Press, https://www.altpress.com/queer-cowboy-pop-culture-history-explained/.

[5] 2021년에서 2022년 무렵 영미권 대중문화에서 중년 남성배우를 팬덤에서 베이비걸(babygirl)로 부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배우로 “나르코스”에 출연한 페드로 파스칼(Pedro Pascal)을 들 수 있다. Gavia Baker-Whitelaw, “What does babygirl mean? And why does it refer to middle-aged men?”, May 10, 2023, Daily Dot, https://www.dailydot.com/unclick/what-does-babygirl-mean-men-fandom/.

[6] 질량을 다루는 조각가가 마치 황야에 홀로 서서 세상의 무게를 견디는 듯한 카우보이같아 하는 말이었을까? 카우보이에 내포된 성별은 조각가 각각의 젠더나 섹슈얼리티와 무관할까? 

[7] 이유성의 작업에서 배반을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은 조형에서 드러나는 초현실성이다. 그에 비하면 이번 작품들은 조형적 특성에서 매우 현실적인 틀(인체)의 영향력을 끝내 지울 수 없다. 쪼개져 손과 손이 포개져 있거나 음이 양이 되거나 변주가 없지는 않지만, 보는 사람은 여전히 인간의 형상을 놓지 못할 것이다. 초현실성에서 인간 형상으로 점프한 점에 가치를 둘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초현실적 요소가 있다고 보결할 것인가. 둘 다 흥미롭지 않은 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8] 디디에 앙지외, “피부자아”, 권정아, 안석 옮김(서울: 인간희극, 2008), 42. 

[9] 레거시 러셀,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 다연 옮김(서울: 미디어버스, 2022), 109-111.

[10] 조르조 아감벤, “행간”, 윤병언 옮김(서울: 자음과모음, 2015), 154-159. 

[11] 이하 본문에서 별다른 인용 출처 표기 없이 따옴표로 표시된 부분은 이유성 작가의 말-글로, 대부분 작가가 구글 독스로 공유해 준 작가노트에 있는 내용이다. 2023. 7.

[12] 장-피에르 보, “도둑맞은 손”, 김현경 옮김(서울: 이음, 2019), 128.

[13] 장-피에르 보, “도둑맞은 손”, 48-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