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학술원에의 보고

박승원개인전

  • 전시일정: 2019. 5. 31. ~ 6. 23.
  • 전시장소: 아트스페이스 보안1 (보안여관 구관)
  • 운영시간: 12:00 ~ 18:00 (월요일휴관)
  • 후원: 서울문화재단
오프닝
  • 일시: 2019. 5. 31. 17:00
  • 장소: 아트스페이스 보안1
A Report to an Academy

Park, Seungwon Solo Exhibition

  • Period: 31. May. 2019 ~ 24. June. 2019
  • Venue: ART SPACE BOAN 1
  • Opening Hours: 12:00 ~ 18:00
  • Closing Days: Every Week Monday
  • Supported by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Opening
  • Date: 31. May. 2019, 5pm
  • Venue: ART SPACE BOAN 1

통의동 보안여관은 인간의 유한성을 신체적 한계로 명확하게 드러내는 작가의 행위들을 통해 재조명하는 박승원의 개인전 《어느 학술원에의 보고》를 개최한다.

전시제목인 「어느 학술원에서의 보고(Ein Bereicht fuer eine Akademie)」는 사람들에게 생포된 원숭이가 인간의 모습을 모방하고 습득하여 사회로 진입한 후 어느 학술원에 초대되어 자유로웠던 원숭이 시절에 대해 발표하는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단편 소설이다. 

학술원에서 원숭이는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인간화되어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인간들도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내포하며 발표한다. 원숭이는 생존을 위해 현실적인 존재 방식을 체득한 대신 과거의 자유, 즉 원시적인 행동을 그리워하게 되었지만 인간은 그저 오래전부터 관습화된 규제에 맞춰 살아오고 있음을 발표를 통해 알 수 있다. 

인간은 사회 규범 속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주체적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많은 제도들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조정하고 억압한다. 현대인들은 본인의 자아와 가치관보다 규정해 놓은 잣대들로 사회적 위치를 확인하고 진단하려고 한다. 이는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존재는 망각되었다.

사회에 의해 주체적 존재가 결핍되고 억압되면서 실체의 가치 혼돈이 발생한다. 하지만 진정한 자아를 추구하며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기 위해 나아간다.《어느 학술원에의 보고》는 이러한 인간 유한성을 신체적 한계로 명확하게 드러내는 작가의 행위들을 통해 재조명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관객에게 오랜 시간 묵과해 온 인간의 실체를 환기시키고 동시에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인간다운 삶’의 모습이 지향해야 할 지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비인칭적인 것-되기 (Becoming Impersonal)

.

누구나 한번쯤은 현실에서의 불평등을 경험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속한 세계는 인류 대부분이 속한 현실태와는 다른 곳임이 분명하다. 세대, 언어, 경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살아가는 대개는 암묵적으로 공통감각을 인지하고 있다. 상식일 수도 있고 보편성일 수도 있다.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을 세계의 창조자이자 구원자로 상정한다. 신의 존재가 없지는 않지만 신 역시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으며, 무엇보다 신은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재현된다. 여하튼 신의 유무를 따질 필요는 없다. 이미 인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지구를 지배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차피 인간이 자연과 동식물 모두를 지배하는 지구의 권력자란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 반대를 한번 상상해보자. 식물의 반란, 자연의 분노, 동물의 지성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를. 인류는 문명을 빌미로 고대부터 현재까지 자연을 착취하고 독점하고 있다. 자연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개발되고 언어의 세례를 받아 하나의 인격을 부여받는다. 자연의 허락이나 의중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자연은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허나 현재 전 세계가 겪고 있는 환경의 반란, 생태계 혼란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위기를 알려준다. 박승원의 작업은 외형적으로는 신체와 행위에 집중되어 있으나 실제로 그의 궁극적 질문은 말과 몸 사이의 위계에서 출발한다. 어떻게 말(언어-논리)이 몸(비언어-비이성)을 지배하는지, 언어 밖의 신체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언어를 대신하는 몸짓이 언어를 대체하는 등가인지를 체현하거나 풍자한다. 어떤 면에서 수행이나 개그(gag)처럼 보이는 일련의 행위들은 스스로 언어의 굴레에서 몸을 해방시키기 위한 몸부림이다. 즉 이러한 몸짓은 몸의 사유를 실천하기 위한 행위이고, 이는 박승원이 갈구하는 하나의 존재 방식이라 부를 수 있겠다.

***

박승원은 언어를 중심으로 형성된 문명세계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감행한다. 그 시작은 원숭이 되기였다. 독일 유학 당시부터 시작된 원숭이 되기는 상당히 물리적인 훈련의 시간이었다. 어쩌면 이 행위는 관습과 훈육으로 형성된 인간성을 지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작가는 당시의 자신을 두고 자유로운 원숭이로 살았다고 표현한다. 이번 전시의 모티브이기도 한 카프카의 소설 「어느 학술에서의 보고」의 주인공 원숭이는 자유를 갈구하면서 인간으로 스스로 ‘진화’하는 자의식을 가진 존재로 묘사된다. 여기서 원숭이는 운명이 아닌 환경에 순응하는 긍정의 의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인간들에게 자신의 실존을 변론하는 대담함까지 지니고 있다. 사실 카프카의 소설세계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변신이란 주제는 대부분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데 흥미롭게도 이 소설은 언어 습득을 통하여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에 이른다. 최근 개봉한 영화 어스(Us, 2019)에서도 유사한 세계관이 등장한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인간의 안락한 생을 위하여 태어난 복제인간의 반란을 다루었는데, 그들은 원본과 동일한 외형을 지니고 있지만 언어를 갖지 못한 존재로 그려진다. 반란의 시작은 언어를 습득한 복제인간 덕분에 가능하다는 설정이다. 이처럼 언어는 정신과 생각을 대신한다. 몸은 언어의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일 뿐이다.

박승원은 카프카의 소설과는 반대의 방식으로 자유를 갈구했다. 인간으로 길들여진 관습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원숭이가 되기’라는 프로젝트는 문명에 의해 내재화된 인간으로서의 굴레를 벗어나 본능에 충실한 삶을 향한다. 그렇다고 원숭이가 되는 길이 수월하지는 않았다. 원숭이처럼 걷고 행동은 신체에 무리를 줬다고 한다. 자유에의 의자가 운명의 굴레인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게 하지는 못 한 것일까. 그럼에도 원숭이가 되는 자유란 아마도 언어, 민족, 종교, 성과 문화적 굴레에서 벗어날 자유를 경험했다는 의미로 들렸다.

그의 작업을 살펴보자. 대개의 작업은 행위를 기록한 영상, 사운드 그리고 간단한 설치로 이뤄진다. “숨”(2018)에서는 한 사내가 등장한다. 그는 난간 위에서 몸을 굴리며 이동 중이다. 모니터를 수직으로 이동시켜 사내의 움직임은 보다 위태롭게 보인다. 그가 어떤 연유로 저런 위험한 행위를 하는지를 알 수는 없다. 따라서 이동 자체가 목적인 이 사내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서만 존재한다. 아감벤은 무용가의 몸짓, 포르노 배우의 몸짓 그리고 무언극 배우의 몸짓을 비교하는 데, 이 과정이 어떤 위계나 서열을 위한 분석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춤이 움직임을 위한 수단으로 어떤 논리를 가진 것이라는 해석을 두고 아감벤은 애써 아쉬움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몸짓으로서의 춤 자체가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매개라고 주장한다. “만일 춤이 몸짓이라면, 그것은 춤이 신체 운동의 매개적 성격을 짊어지고 전시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매개란 개념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필연적이고 불가역적인 존재론적 행동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몸짓이 곧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 언어적 수단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몸짓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질문해보는 것이다. 우리는 왜 몸짓을 사용하는 것일까? 언어의 한계 때문에, 표현의 부족함을 부연하기 위하여, 아니면 언어 자체를 초월하거나 의도적으로 언어 바깥으로 미끄러지고자 그러한 것일까? 다시 “숨”으로 되돌아가보자. 사내가 위태로운 몸짓을 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가? 그는 발전과 성공의 상징물이 되어버린 고층건물 맨 꼭대기 난간에서 위태로운 곡예를 벌이고 있다. 끊임없는 발전을 추구하는 근대의 이상이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 같은 고소공포증을 일으킨다. 한나 아렌트는 근대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근대인은 엄격히 말하자면 생명을 얻지 못했다. 그는 자신에게로 내던져졌고 폐쇄된 자기반성의 내부로 내던져졌다. 여기서 그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계산하는 정신의 텅 빈 과정이며 자기 자신과 행하는 정신의 작용이다. 이 정신에 남겨진 유일한 내용은 탐욕과 욕망, 즉 신체의 무감각적인 충동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 전체주의 사상은 불필요한 유토피아 개발에 집착함에 따라 인간을 한낱 쓸모없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만다. 그렇다면 인간이 살아가기 위하여 필요한 조건이란 무엇일까?  아렌트는 그 조건을 생명, 사유에 의한 자신만의 세계 구축, 함께 세계를 나눌 수 있는 언어와 행동을 들었다. 어쩌면 난간 위에서 스스로 고립된 사내는 아직까지 찾지 못한 잃어버린 인간의 조건을 위해 스스로 고행을 자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박승원이 스스로 인간의 형상을 버리고 동물의 몸짓을 연구하고 단련한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게 아닌지 자문해본다. 박승원은 동시대인의 심리를 재현하기보다 현실을 겪어내는 몸의 현상을 체현함으로써 성공에 눈이 먼 괴물이 되는 대신 동물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그는 언어를 버리고 사유의 바깥으로 향한다. 마치 난간 위의 사내가 말 대신 위태로움 자체를 온몸으로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

“대화”(2018)에서 사내는 한 건물의 상부에 올라가 반복적으로 발을 구른다. 일정하게 몸을 굴러 소음을 발생시키는 이 행위는 텅 빈 밤 공간을 채운다. 어딘지 모르게 고조된 감정을 유발시키는 사내의 몸짓은 그것만이 실존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이라 절규하는 것만 같다. 한때 원숭이로 살았던 이 사내는 끝내 인간의 언어로 발화하지 못 하였다. 이처럼 부엉이도 잠든 밤을 둔탁한 소음으로 깨우는 소심한 소란 정도가 사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도발이다. 사내의 초라한 도발은 계속 진행된다. 서로 짝을 이룬 작업 “세례”(2017)와 “고행”(2017)에서 사내는 쉬지 않고 물을 들이켜는가 하면, 변기를 향해 몸속의 오줌을 전부 배출시키려 한다. 브루스 나우만과 마르셀 뒤샹을 전유한 이 행위는 반복행위에 의한 강박 심리를 고조시킨다. 흡입과 배출이란 단순한 생체 매커니즘을 체현한 사내의 모습은 생명과 삶의 관계를 되묻게 한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관점으로 본다면, 박승원이 제시하는 신체는 행위와 의미가 묶여있는 정신분석학적 관계라기보다 오히려 생산과 연결만이 존재 방식이라는 의견에 더 가까워보인다. 그러니까 박승원 작업에서 나타나는 신체와 움직임은 심리학적 의미나 해석이 아니라 신체들, 기관들이 서로 연결되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검은 발”(2019)은 흰 눈 위에 서 있는 발을 찍은 영상이다. 체온에 의해 눈은 녹기 마련이다. 마침내 흰 눈에 가려진 검은 땅이 발자국 모양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실존의 흔적이 아닌 잔존(survival)의 결과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무엇보다 사유와 분열증의 대립을 어떻게 볼 것인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유를 (정상적) 인간의 특권으로 보고 정신분열증을 사유의 파괴 또는 증상으로 특정 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그것을 ‘사유의 한 가능성’으로 보았다. 박승원의 동물 되기는 퇴행이 아니다. 부조리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그의 행위는 앙토냉 아르토를 연상시키는데, 아르토는 인간이 사유를 본래 타고난다는 불교적 진리를 부정하였다. 그는 “자신을 존재라고, 본유성에 의한 존재라고 믿는 자들은 바보이다. 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존재하기 위해 내 본유성(本有性)을 채찍질해야 하는 자다”라고 고백했다. 박승원은 나 이전에 이미 내재화된 나의 표상, 관념을 벗어나 스스로의 해방을 꿈꾼다. 요컨대 그 해방에의 의지는 해석에의 반대이기도 하다. 「어느 학술에서의 보고」가 인간만큼의 지식을 쌓은 원숭이의 자기 계발의 신화로 미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란 건 이미 여러분도 예측했으리라. 소설 속 원숭이는 이렇게 항변한다. “되풀이하겠습니다만 인간들을 모방하고 싶다는 유혹은 없었습니다, 저는 출구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모방했습니다, 다른 그 어떤 이유에서도 아니었지요.”

***

들뢰즈의 관점으로 보면, 원숭이는 사유의 바깥, 신체를 통한 사유를 실천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모방이었기 때문이다. 원숭이는 다른 울타리를 욕망했고 그렇게 다른 존재로의 탈주를 감행했다. 빨간 페터는 순수 자아를 버리고 언어 획득에 성공한 원숭이지만 그것은 실존이라기보다 생존 의지에 더 가까워보인다. 빨간 페터는 동물과 인간 사이의 중간존재로 귀결된다. 생존을 위하여 신체는 주변의 힘들과 관계를 맺는다. 이 외적 필연성이 곧 사유를 실천하는 존재 방식이 된다는 것이다. 박승원의 원숭이 되기는 몸의 사유를 겨냥하고 있다. 몸의 사유란 근대적 주체인 이성과 사유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숭이 되기 프로젝트는 다른 말로 ‘비인칭적인 것으로의 탈주’라 불러도 될 것 같다. 그것은 연극적 몸도 아니고 실제로 어떤 대상을 모방하지도 않는다. 요컨대 박승원은 퍼포먼스라는 예술 형식과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양한 기관들의 매커니즘으로 작동하는 몸의 존재방식을 통하여 신체의 윤리가 무엇인지를 실험하는 중이다. 가난한 이미지들을 되레 화려한 언어적 수사와 시각적 스펙터클로 둔갑시키는 동시대 미술 생태에서 박승원의 작업은 언어 바깥을 향하여 탈주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엉뚱함이야말로 우리가 아직까지도 예술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정현

포스터

Poster

영상링크

위 텍스트를 클릭하시면 포스터 관련 제작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전시전경

Exhibition View

사진: 정정호

Photographer: Jungho jung

작품이미지

Steel C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