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합 두번째 전시
래빗홀

  • 참여작가: 김동해, 김준수, 백경원, 유남권, 이윤정, 이혜선, 정소영
  • 기획: 묘합
  • 일시: 2023. 02. 07 – 02. 26
  • 장소: 아트스페이스 보안 1
  • 운영시간: 12:00 – 18:00
  • 매주 월요일 휴관
  • 입장료 무료

Myohab 2nd Exhibition
Rabbit Hole

  • Artists: DongHae Kim, Junsu Kim, Kyungwon Beak, Namgwon Lyu, Yoonjeong Lee, Hyesun Lee, Soyoung Jung
  • Curator: Team Myohab
  • Date : 7. Feb. 2023 – 26. Feb. 2023
  • Venue : ARTSPACE BOAN 1
  • Time : 12PM – 6PM
  • Closing Days : Every Week Monday
  • Admission Free

토끼는 친근하고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외양 때문에 고대부터 많은 이야기에 등장한다. 위로 길게 솟은 귀, 경계심이 많은 모습, 재빨리 도망가는데 유리한 뒷다리 등 토끼의 특징은 우리의 삶을 드러내는 데 쓰였다. 이 점에 착안하여 묘합은 이야기 속 토끼 네 마리를 2023년을 살아가는 인간의 시점으로 재창조하고, 그들이 사용할 법한 물건과 공간을 만듦으로써 인간사의 단편을 보여주려 한다. 토끼의 방은 곧 나의 방, 혹은 나와 같은 공기를 공유하는 타인의 방이다.

전시 제목인 래빗홀(Rabbit Hall)은 토끼 굴을 의미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연원한, ‘현실과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관람객들이 흰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에 당도한 앨리스처럼 이 세상에 없는 ‘토끼들의 세상’, 하지만 어쩐지 익숙한 ‘우리의 세상’을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1 달에 사는 달 토끼

 

-토끼 나이 어느덧 2023살,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숨은 저녁 토끼는 눈을 뜬다. 물이 없는 달에서 세수는 손으로 그저 대충 털어낼 뿐, 마른세수하고 기지개를 켠 뒤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대단한 운동은 아니지만 수천 년 동안 이어진 루틴이다.

스트레칭을 마치면 어김없이 공이를 확인한다. 공이가 말썽을 부리면 일이 어려워진다. 공이에 약초를 찧어야 세상 사람들에게 복이 가기 때문이다. 달 토끼는 자신을 보며 소원을 비는 인류를 안다. 멀고 먼 거리의 그들이지만 그들이 비는 소원은 모두 달에 무사히 도착한다. 그들의 슬프고 희망차고 즐거운 이야기들을 알기에 오늘도 토끼는 묵묵히 할 일을 한다.

척박한 달에 토끼는 친구가 하나 있다. 토끼와 전혀 다르게 생긴 계수나무.

이들은 서로 종도 다르지만 수천 년을 함께하고 말하지 않아도 아는, 영원한 친구다. 오늘도 토끼는 계수나무를 옆에 두고 방아를 찧는다. 어느덧 해가 뜨고 토끼는 일과를 마친다. 방에 들어와 암막 커튼을 치고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한다.

#2 <별주부전>의 토끼

-순간의 기지로 겨우 목숨을 지킨 토끼는 자라를 따돌리며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온다.

늘 더 쉽고 편하게 살 수 없을까 생각하며 살던 토끼에게 갑자기 나타난 벼슬의 유혹은 너무나 달콤했다. 그럼 그렇지. 뭐든 너무 급하면 탈 나는 거야. 하며 테이블에 놓인 건초를 한 줌 집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풀린 긴장과 함께 찾아온 허기를 달랜다. 꼭꼭 씹으며.

‘자라는 어떻게 됐을까?  아몰라 내가 살았으면 되었어. 사기꾼, 확 잘렸으면 좋겠네.’라고 생각한다.

죽을 뻔한 이후로 토끼는 어딘가 조금 달라졌다. 더 이상 남의 말을 믿지 못한다. 용궁에서 자신을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자신의 말을 증명할 가짜 간 보관함을 만들어뒀다. 누구를 만나든지 의심병이 생겨 모든 일에 계약서를 작성하는 버릇이 생겼다. 친구와 식사 약속을 할 때도, 물건을 빌려줄 때도 계약서를 작성한다. 얕은 잠에 드는 토끼는 계속 깊은 바다에 있는 자신의 꿈을 꾼다. 잠들기 두려워하던 시간을 견디지 못해 수면제를 먹거나 술을 찾기 시작했다.

다시는 바다에 가지 않는다. 그리고 납작 엎드려 걷는 동물만 보이면 심장이 두근거린다.

어쩐지 피곤한 인생이 시작되었다.

#3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흰토끼

-‘아 몇 시야. 나팔을 불러 빨리 가야 하는데.’

시계를 좋아한다고 시간을 잘 지키는 건 아니지만, 시계 수집에 남다른 취향이 있는 흰토끼는 심해도 너무 심한 지각쟁이다. 무릇 지각을 앞둔 자는 그저 일어남과 동시에 물을 대충 얼굴에 대었다가, 눈앞에 보이는 옷을 대충 주워 입고 멈추지 않는 걸음으로 현관을 나서며, 플랫폼에 도착하는 순간 지하철이 오기를, 내가 걷는 모든 길에서 빨간 신호는 만나지 않는 운수 넘치는 하루이길 바라야 하는 법이거늘. 우리의 흰토끼에게 대충은 없다. 양장점에서 맞춘 재킷, 셔츠, 바지 그리고 수제 구두 가득한 옷장 앞에서 사치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시계와 옷을 숱하게 번갈아 입어 보며 착장을 맞추고 나니, 어제 늦는 바람에 가지 못한 바버샵이 아쉽다. 흰토끼가 시계 수집에 집착하는 건 마음과 달리 자꾸 늦게 되는 지각쟁이 최후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규율, 형식, 정확성을 상징하는 모든 물건을 좋아하지만, 시간을 잘 지키지 못할 뿐 아니라 약속을 잊기도 한다. 언제나 정장 차림인 것도, 여왕에게 애교를 부리며 권위 앞에서 자신을 과감하게 낮추는 태도마저 자신의 취약함을 가리기 위함이다.

이 토끼는 취약함을 숨기는 것에 있어 성실하다. 어쨌든 성실하다. 방향이 이상할 뿐.

 

#4 <토끼와 거북이>의 토끼

-피겨하면 김연아, 축구하면 손흥민. 달리기 하면 나

이 토끼에게 숨 쉬는 것만큼 쉬운 건 달리기다. 천적에게 쫓기고만 사는 초식동물의 비애를 그는 이해할 수 없다.

누구에게도 질 것으로 생각해본 적 없는 이 토끼는 제 잘난 맛에 사는 나르시시스트이다. 날 때부터 남달랐다. 달리기로 져 본 적이 없다. 그러니 뭐, 나르시시즘에 근거는 있다. 방에는 온통 자기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울과 달리는 모습이 담긴 사진들, 여러 대회에서 받은 메달들이 널려 있다.

그런데  거북이. 무려 느려빠진 거북이가 경주하자고 한다. 나에 대해 모르는 것 같은 이 거북이가 황당하지만, 그의 인생 경험을 위해 받아줬다. 나 토끼, 관대하기까지 하다. 내일이 시합 날이지만 토끼는 게임에 빠져있다. 헤드폰을 쓰고 누군가와 대화하며 눈이 빨개지도록 열중이다. 지금 시간 새벽 3시. 시합은 내일 아침 9시. 토끼는 지금 그저 게임이 너무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