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미 개인전 < Facing >
위치: 통의동 보안여관 신관 Boan1942 B1
 (서울시 종로구 효자로33 B1)
기간: 2017. 11. 24 – 12. 3 (월요일 휴관)
오프닝리셉션: 11. 24 오후 6시
후원: 서울문화재단
디자인: 권영찬
Wonmi Seo Solo Exhibition  < Facing >
at Boan1942, 33, Hyoja-ro B1, Jongno-gu, Seoul, Korea
2017.11. 24 – 12. 3
Opening Reception: Nov. 24 (fri) 6pm
Supported by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Designed by Youngchan Kwon

호기심으로 시작되는 모든 응시는 대상에 대한 의미적, 형태적 왜곡을 불러온다.
이는 대상을 캔버스 안에 붙잡아 두려 해도 놓치는 부분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과 다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왜곡은 그 대상을 붙잡아 두려는 욕망과 놓치는 쾌감 둘 다를 충족 시킨다. 응시에 따른 재현적이며 고전적인 형식 위에 왜곡 된 우연적이고 추상적인 터치들로 그 표면을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그 두 가지를 오갈 때 생겨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상태를 추구하며 그것은 그려진 형상을 해체한다기 보다 오히려 붓질로서 해체를 형상화 하는 것에 가깝다. 그러한 상태는 캔버스의 이미지가 지시하는 맥락과 물질로서 존재하는 표피적 상태를 제각각 분열된 미술사적 궤적으로서 나타낸다.

(De)Facing

‘순백의 캔버스’라는 클리셰와 달리, 캔버스란 사실 소리 없는 정글이다. 소위 ‘주제’나 ‘소재’라는 1차원적 인지방식을 넘어선다 해도, 화면의 구성과 앵글, 획의 각도, 붓질의 마감 방식, 색채의 미묘한 그라데이션, 마른 물감의 마띠에르 등, 그 어떤 것도 미술사라는 울창한 데이터베이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이런 구속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육체적 마비가 오기도 하고, 그림을 가까스로 끝마친다 해도 세상에 공개하지 못하는 상징적 자폐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물감으로 되풀이될 가치가 없다“는 T. J. 클라크의 단언은 이러한 분열증적 조건을 악화시키는 데 탁월한 효능을 발휘하곤 한다) 이런 “과도한 경외감”의 폐해에 대해 루시안 프로이드는 미술관은 “돌아오기 위해” 가는 것이라고 조언한 바 있는데, “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가는 것”처럼 미술사를 방문하라는 그의 말은 안도감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안을 기정사실화한다. 작가란 사실 (잠재적) ‘환자’인 것이다.
무엇보다 이 불길한 조언의 제공자가 육체, 혹은 몸뚱아리의 회화적 육화라는 차원에서 서원미의 화폭과 우리의 망막 사이를 어슬렁대는 맹수 중 하나라는 사실은 사태를 더욱 긴박한 것으로 만든다. 물론 맹수는 한 둘이 아니다. 이번 전시작 전반을 관통하는 “안과 겉이 뒤바뀌”는 “해부학”에 대한 서작가의 관심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그릴 때[에도] 항상 옷을 벗은 사람들 또는 옷을 입은 동물들을 자주 떠올”렸던 프로이드는 물론, 베이컨의 화폭에서 범람하는, 피부를 잘 발라낸 ‘살코기’ 같은 몸들을 호출한다. 또한 그렇게 드러난 내피, 특히 인물들의 눈 주위에서 마치 폭죽처럼 명멸하면서 ‘시선’을 제거해버리는 화려한 색채의 반죽들은 물감의 물성 차원에서 아드리안 게니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또한 이번 전시엔 포함되지 않은 그녀의 또 다른 흥미로운 연작인 ‘검은 커튼‘ 시리즈들은, 미카엘 보레만스와 마를린 뒤마스의 그림자들 사이에서 뮤트 상태로 진동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인식은, 작가란 근본적인 의미에서 ‘환자’라는- 그러고 보면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였던- 루시안 프로이드의 ‘진단’을 기각할 게 아니라 더욱 밀고 나아가게끔 만든다. 왜냐하면 예술가란 ‘환자 되기’를 스스로 선택한 자, 스스로를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질병에 노출시키고 자발적으로 감염된 후, 이를 통해 자신의- 때론 인류의- 건강을 (미리) 테스트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서원미는 정글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즉 이 정글 캔버스를 ‘힘의 장(force field)’으로 간주한다면, 각각의 그림은 강력한 힘으로 작가를 밀고 당기는 서로 다른 대가들 사이에서, 작가가- 사지가 찢겨나가는 ‘능지처참’의 위험을 감수하고- 남긴 족적, 혹은 춤사위를 이룬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응시
그 궤적을 따라갈 때 드러나는 것, 혹은 살아남는 건 ‘응시’,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서의 응시다. 작가는 “모든 응시는 대상에 대한 의미적, 형태적 왜곡을 불러온다”는 식으로 일반화하지만, 그러한 일반화 자체가 징후적으로 보인다. 조금 앞질러 말해두자면, 이러한 ‘응시의 오작동’은 서원미의 그림들 속에서 그 응시가 주시하(려)는 대상이- 작가 자신의 말을 빌면- ‘죽음’이란 사실과 관련된다. 죽음은 애초부터 직면(facing) 가능한 시각적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응시와 죽음의 어긋남을 가장 압도적으로, 동시에 덤덤하게 보여준 작품 중 하나는 여전히 스탠 브래키지의 (1971)다. ‘부검/검시’라고 번역되는 autopsy라는 단어를 어원 그대로 풀어쓴 이 실험영화는, 시체 안치소에서 통째로 벗겨지는 시체들의 모습을 아무런 설명과 스토리, 사운드 없이 32분간 담는다. 스폰지나 건조해진 두부, 혹은 호빵 같아진 인간의 몸이 메스에 의해 잘리고, 그들의 피부가 두꺼운 비닐 통째로 벗겨지는 걸 ‘자기 두 눈으로 보는 행위’인 이 작업은 당연히 끔찍하고, 무서우며, 결코 다시 보고 싶지 않지만, 이는 우리가 ‘죽음’을 보았거나, 사후세계의 부재를 확인했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이 거기 없기 때문이다.
(2015)나 (2015), (2014), (2014)처럼 응시의 대상과 주체가 명확히 드러나 있는 작업들 뿐 아니라, (2015-16) 시리즈처럼 응시의 대상이 부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림들은 따로 또 같이 이러한 어긋남을 형상화한다. 얼핏 볼 때와 달리 면밀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 응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 응시의 축이라 할 머리의 각도에도 불구하고 관계로서의 ‘응시’를 결정, 혹은 완성한다 할 눈 부분이 대부분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베이컨에 대한 아름다운 책에서 들뢰즈는 베이컨이 “초상화가”인 건 맞지만, 그는 “얼굴의 화가”가 아니라 “머리의 화가”라고 강조한 바 있는데, (2015)와 (2015) 사이의 유사성, 즉 눈이 훼손된 얼굴과 해부학적 두부 사이의 근접성은 정확하게 이런 의미에서 서원미에게도 적용 가능하다. 또한 작가는 죽음을 반드시 부정적이지만은 않은 것으로 본다고 말한 적도 있는데, 죽음을 인간 세상에 가져다 준 성경적 참조점인 사과를 손에 든 작가의 자화상과 해골을 대면(facing)시킨 그의 최근작 역시 이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나, 베이컨과 게니 양자에게 응시의 문제는 주변적이라는 점에서 서원미는 미세한 거리를 유지한다.
얼굴과 머리, 죽음과 응시가 만드는 이 미묘한 관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면, 이번 전시의 작업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눈을 훼손해 얼굴을 탈얼굴화(de-facing)한 후 머리에 근접시키고, 그러한 머리들을 다시 응시의 구도에 집어넣음으로써 얼굴화(facing)하려는 일련의 시도, 혹은 뫼비우스의 띠.
당신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그림들인 것이다.

곽영빈(미술평론가/영화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