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하 개인전

BOAN1942(통의동 보안여관)외부

홍기하개인전

S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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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시 : 2021. 11. 30 ~ 2022. 03. 27
  • 장소 : 보안1942(통의동 보안여관) 야외
  • 운영시간 : 항시 관람 가능
  • 상세장소: 33마켓 입구, 33마켓↔︎아트스페이스 보안1 사이, 아트스페이스 보안 1 입구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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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윗 보안 <생태적 시각 - 야생의 감수성으로 본 세상>

스터디 윗 보안

생태적 시각 – 야생의 감수성으로 본 세상

스터디윗보안_김산하

일시: 2021년 10월 22일 금요일 오후 7시
강연: 김산하
장소: ZOOM
참가비: 7천원 (보안손님일 경우 5천원)
소요시간: 1시간 30분 – 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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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정 개인전 <지켜보는 사람>

ARTSPACE BOAN 1
Kim So Jeong Solo Exhibition
The gazer
김소정 개인전
지켜보는 사람

인쇄용 포스터

  • Date : 15. Oct. – 6. Nov. 2021
  • Venue : ART SPACE BOAN1
  • Opening Hours : 12PM – 6PM
  • Closing Days : Every Week Monday
  • Admission Free
  • 일시 : 2021. 10. 15 – 11. 6
  • 장소 : 아트 스페이스 보안1 (구 보안여관 전시장)
  • 운영시간 : 12:00 – 18:00
  • 매주 월요일 휴관
  • 입장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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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OUQUET

A BOUQUET

웹용 포스터

[INVITATION ONLY]

  • DATE: 26TH MAY 2021
  • Opening Hours: 1PM – 8PM
  • 일시: 2021. 05. 26
  • 장소: 아트스페이스 보안 2 (신관 지하 1층)
  • 운영시간: 13:00 ~ 20:00
  • 초대권을 받으신 분들만 입장 가능합니다.

[PUBLIC]

  • DATE: 27TH – 31ST MAY 2021
  • Venue: ARTSPACE BOAN 2
  • Opening Hours: 10AM – 7PM
  • Admission Free
  • 일시: 2021. 05. 27 ~ 05. 31
  • 장소: 아트스페이스 보안 2 (신관 지하 1층)
  • 운영시간: 10:00 ~ 19:00
  • 입장료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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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시간은 온다>

KOON KWON Solo Exhibition
The Return of the Lost Time
권군 개인전
빼앗긴 시간은 온다
빼앗긴 시간은 온다_웹용
  • Date: 03. JUNE. – 27. JUNE. 2021
  • Venue: ART SPACE BOAN 1
  • Opening Hours: 12PM – 6PM
  • Closing Days: Every Week Monday
  • Admission Free
  • 일시: 2021. 06. 03 ~ 06. 27
  • 장소: 아트 스페이스 보안 1 (구 보안여관 전시장)
  • 운영시간: 12:00 ~ 18:00
  • 월요일 휴관
  • 입장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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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부산인들의 대화 녹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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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대 부산인들의 대화 >

 

<60년대 부산인들의 대화> 는 《 혼종_메이드 인 부산 》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부산이 지니고 있는 다채롭고 흥미로운 맥락들을 ‘혼종’이라는 키워드로 들여다보는 토크다.

 

비슷한 시기에 서로 2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부산 초량동 근방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것을 발견한 최욱, 최정화, 최성우 세 사람이 정성갑 모더레이터의 진행과 함께 각자의 기억 속 부산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늘날 건축가, 설치미술가, 문화예술기획자로서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그들에게 같은 지역과 시대는 어떤 의미인지, 각자에게 어떤 의미로 작동을 했는지를 살펴보며 부산이 지니고 있는 다채롭고 흥미로운 맥락들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정성갑 모더레이터의 토크 소개와 연사 소개 후에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정성갑 모더레이터

최욱 소장님, 최정화 작가님, 최성우 대표님 세 분이 알고 봤더니 다 부산 출신이시고, 그 중에서도 초량이라는 지역 출신이세요. 부산에서도 반경 1.5km안에서 세분 다  유년을 보내신 거예요. 그래서 이 초량이라는 지역이 궁금해지더라고요, 굉장히 기가 좋은 것 같고, 풍수지리도 뭔가 좋을 것 같고. 그래서 이렇게 뭐 걸출한 인물들이 나온 것 아닌가. 근데 뭐 풍수지리적으로 특별한 건 딱히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굉장히 유명한 분들을 배출해낸 땅이지요.

오늘 토크의 키워드는 60년대 부산이에요.감히 말씀드리자면 이야깃거리가 굉장히 풍성할 것 같습니다. 리서치를 하면서 저도 처음 알았는데 1950년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잖아요.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이 함락되고 2개월만에 부산을 임시 수도로 지정을 했더라고요, 그러니까 당연히 사람이 몰릴 수밖에 없고, 군수물자가 몰릴 수밖에 없지요. 53년에 휴전 협전이 맺어지면서 평화가 찾아왔는데, 그로부터 7년 이후가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60년대인 거잖아요, 그 60년대라고 생각하면 카오스, 돈도 사람도 물자도 당연히 문화도 거기서 용광로처럼 들끓었던 시대가 아니었나 생각을 하고, 다양한 키워드가 뜰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최성우 대표님께 질문]

최성우 대표님은 메이드인 어디어디 시리즈를 서울에서 부터 시작해서 부산이 두번째에요. 인천도 하실 계획이 있고, 목포도 하실 계획이 있고 그런데 메이드인 시리즈를 하시게 된 이유와 목적, 그리고 그 앞에 혼종이라는 키워드를 붙인 이유에 대해서 한 말씀 듣고 토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최성우 대표

저희 전시 이야기는 뭐 굳이 장황하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저희가 하는 메이드인 시리즈는 한 해마다 하나의 지역을 다루는 겁니다. 그건 앞으로 아마 추후에 지켜보시면 될 것 같고.

이 토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만 얘기하면 될 것 같습니다. 메이드인 부산이라는 전시의 연계 프로그램을 생각하다가 제가 최근에 최정화 작가님을 뵙게 되고 최정화 작가님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초량출신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초량 출신이 한 분 더 계시는 거에요.

최욱 선생님은 제가 몇년 전에 부산에서 저희 재단 건물에 오셔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어요. 그런데 저와 정서적으로 굉장히 공감이 잘 되고 쉽게 이해를 하시고 또 초량이라는 지역에 대한 이해도도 굉장히 높으시더라고요. 저는 처음에 부산 출신이라는 걸 몰랐어요. 말씀을 굳이 부산 출신이라는 걸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까 부산 초량이시고 저랑 비슷한 연령이시고, 저하고 한 십몇년정도를 1.5km반경에 같이 살았더라고요. 그렇게 보면 최정화작가님도 그런 작가님이시고.

물론 사람이라는게 같은 시대와 같은 지역, 시대를 살았다고 해서 공동의 기억을 가지는 것만은 아니잖아요. 개별 기억과 가족마다의 기억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동시대 유사한 지역에서 십수년 동안 같은 지역을 공유하고 같은 공기를 숨쉬고, 초량이라는, 전시 제목처럼 소위 혼종의 지역을 같이 살아 냈고, 또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서 꽤 오랜 시간 이후에 각 분야에서 나름의 자기 위치에서  누구보다도 독특한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서 우리한테 보여주고 계신 분들이거든요. 저야 뭐 여관한다고 촐랑대고 있기 때문에 저 보러 오신 분은 없으실 거고 두 분을 뵈러 오셨겠죠.

그래서 아무튼 이게 도대체 동시대적 기억과 지역에 대한 기억들이 어떻게 각 분야의 세 사람한테 작동을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공통의 부분이 있고, 두 분의 작품세계만 봐도 아시겠지만 공통적이지 않은 부분도 분명히 있거든요. 그것을 한번 자유롭게 이 자리에서 나눠보면 어떨까 해서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정성갑 모더레이터

본의아니게 세 분이 나이 순으로 앉으셨어요. 우리나라는 어쩔수 없나봐요. 본능적으로 어디에 앉아야 하나 하면 이렇게 앉으시네요. 60년생이시고 61년 생이시고 63년생이세요.

 

[최정화 작가에게 질문]

최정화 작가님께 질문 해볼게요. 보면 여러분들도 느끼겠지만 저는 세 분을 놓고 그분의 유년시절, 학창시절을 자연스럽게 이렇게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우리 최정화 작가님 떠올리면 주먹도 쓰셨을 것 같고. 활동하는 것도 나이트 클럽부터해서 바부터 이렇게 좀 놀아보지 않았으면 만들 수 없는 컨텐츠를 계속 만드셨잖아요. 그리고 작가님 아버님이 군인이셔가지고 이사를 많이 다니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량의 시장, 그 시장이 나를 키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라고 또 말씀을 하셨는데 돌아서 생각해보면 선생님 작품에 있는 것들은 결국엔 다 시장에 있는 것들이에요. 소쿠리, 바케쓰 빗자루. 선생님에게 초량은 어떤 지역이었고, 저희 예상대로 주먹도 쓰고 노는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그 지역을 기억하고 보내셨는지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최정화 작가

우선 국민학교 6년 동안 여덟군데를 전학을 다녀서 전 정말 왕따였고요. 혼자서만 놀고, 주먹 한번 써본적이 없고, 말 한마디 못하는 정말 여리고 여리고 그런 소년이었어요. 제 호적상의 본적은 서울 인사동 70번지에요 근데 산 적도 없고 어딘지도 몰라요. 부모님이 아버님은 함경도, 어머님은 평양 그래서 월남하셨으니까 본적을 만들어야 했었고 그래서 인사동에 만들어 놓았던거죠. 근데 저희 큰아버님이 먼저 내려가서 살고 계셨고, 그리고 아버님이 조금 늦게 내려오셨어요. 그리고 초량에 와서 부산에서도 구포, 가야, 아무튼 부산 내에서도 여러 군데에 이사를 다녀요. 그러다 구포에 은하사라는 절에 작은 할아버지가 주지이셔서 아버님이 저를 데리고 그렇게 이절 저절로 뛰어다녔어요. 도사님들 소개시켜준다고. 저도 그 도사님들의 영향을 받았겠죠.

 

정성갑 모더레이터

마이크가 이제 최욱 소장님한테 갔는데, 저는 강연자 명단을 보고 깜짝 놀란게 최욱 소장님 댁에도 한번 초대를 받아서 갔었고 최욱 소장님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서도 알아요. 인터뷰를 준비하면서도 들은 바가 있는데 소장님이 아침형 인간이시거든요. 이른 새벽에 일어나셔서 집필도 하시고 때로 정원에 물도 주시고. 또 일찍 일어나시니까 오래오래 버티지 못하세요. 집에서 아내분도 혼자 가서 작업 따로 하시고 소장님은 일찍 주무시는데 오늘 저녁 모임에 오신다고 하길래 우리 소장님이 어떤 생각으로 이거를 수락하신건지 궁금했습니다. 소장님이 토크를 그렇게 좋아하시는 것도 아니에요. 어떤 신문이랑 인터뷰해 가지고 기사 쓴 걸 보면 첫번째 질문이 이런 것이에요. “최욱 소장은 조용한 사람이다.” 선생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오신건지? 무엇을 기대하고 오셨는지 궁금해요.

 

최욱 소장

처음에 부산인 토크한다고 했을 때 저는 부산에서 하는 줄 알았어요. 일단은 부산에 한 번 가볼 수 있겠다 했었지요. 나중에서야 여기서 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이제 최정화 선생님이 이제 절 이야기했는데, 저도 절이랑 인연이 있어요. 제가 어릴 적에 몸이 많이 아팠는데, 애기가 아프니까 어머니가 걱정이 되셔서 점을 치러 많이 다녔어요. 그랬더니 점쟁이가 저는 스님 팔자니 산으로 가야 한다고. 그래서 저는 초량동 꼭대기 산에 살다가 초등학교를 다녀야 되어서 내려왔어요. 그래서 제가 절이랑도 인연이 있고 새벽 세시 반에 일어나요. 이게 거의 30, 40년 루틴인거죠.

 

정성갑 모더레이터

네 세 분 다 아침형인 것 같아요. 오늘 여러분들이 세 분 토크하시는 거 보면서 공통점하고 차이점을 찾아보는 게 재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 콘트라스트가 있는 분들이 최욱 대표님하고 최정화 선생님인데 작품 세계만 봐도 이렇게 단정하는 건 좀 위험할 수 있지만 최욱 선생님은 미니멀리즘에 가깝다면 최정화 선생님은 무조건 맥시멀리즘이잖아요. 더한 단어가 있다면 그 단어를 쓰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다름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또 세 분 다 식물을 엄청 좋아하시고, 책을 또 좋아하셔서 녹색 평론 잡지부터 시작하셔서 문학과 소설도 당연하고, 책을 가까이하세요. 키워드가 겹치는 게 많아요. 그런 걸 보면서 관전 포인트로 삼으셔도 좋을 것 같아요.

 

 

관객 질문

세 분다 서울에 사시는데 서울에 왜 오셨나요?

 

최욱 소장

저희 집안은 비즈니스 하는 집안인데, 아버님께서 사업처가 서울이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요. 식구들도 다 서울에 있고.

 

최정화 작가

저는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의지가 없었으니까 끌려온거죠. 어디였어도 갔겠죠.

 

최성우 대표

저는 대학 때문이에요. 대학을 서울로 오는 바람에.

 

정성갑 모더레이터

[최정화 작가에게 질문]

최정화 작가님이 최근에 가장 화두에 두고 있는 오브제가 무엇인가요?

 

최정화 작가

저는 전국의 시장, 큰 시장 작은 시장에 관심이 많아요. 사실 최근에는 김해의 시장을 갔었어요. 근데 김해의 시장은 대한민국의 전통시장인데 물건을 팔고계시는 분들은 다 동남아 분들이에요. 굉장히 많은 사진을 찍어오고 놀랐는데 시각적으로는 한국이 아니에요. 김해 시장 외에도 전국의 모든 시장을 좋아하는데, 제 사부님은 다 시장 이에요, 시장에 계신 어머님 아버님 누나 언니 할머님. 그분들 영향과 그분들을 베끼는 게 제 목적이고 답이고. 현재도 이렇게 하고 있고요.

그러면서 최근에는 오만가지를 쌓다가 최근에 숫자를 쌓기 시작했어요 그런 작업을 박여숙 갤러리오시면 볼 수 있어요..숫자를 쌓는다는 것은 살짝 힌트를 주면 피보나치 수열. 1, 1, 2, 3, 5, 8, 13, 21, 33, 55. 저는 이거를 돈버는 부적 이라고 말하죠. 제가 이제 부적 장사를 시작했어요. 상품과 제품 작품을 일치시키는 뻔뻔한 사기를 치고 있으니까 기대해주시고요.

 

 

정성갑 모더레이터

[최성우 대표에게 질문]

60년대 부산은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돌아간지 7년 10년이 지난 즈음이에요. 러시아 타운, 총을 들고 다니는 군인들이 많다고 해서 텍사스 타운이라는 것도 있었고, 당연히 차이나 타운도 있었고, 일본 문화도 많았고, 한국 문화도 있었고, 거기에서 세를 불리고 돈을 벌어서 집을 좀 일으켜보고자하는 사람도 많았지요. 다양한 문화가 섞였고, 거기에서 대표님이 말씀하신 단어는 아수라장이었어요. 모범적인 답안으로서 A가 아니라 약간 B급 감성, 여러 개가 섞이고 혼종되고 그러면서 만들어진 특이하고 재미있고 이런 문화들이 많았던 곳이죠. 거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지금 대표님이 하시는 일들이 약간 메인스트림에서 벗어나 있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제가 만약에 대표님처럼 자산이 있으면 우아하게 갤러리하고 싶거든요. 좋은 작가들 좋은 작품들만 해서 누리고 싶고. 그런데 항상 젊은 작가들, 새로운 실험적인 작가들, 그런 플랫폼으로서 기능을 하려고 노력을 하세요. 60년대 부산이 가졌던 B급 감성의 진원지로서의 부산을 추억해주시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최성우 대표

B급 감성이란 건 소위 말하는 항상 변방에 머무는 거지요. 중앙이 아니라 변방에 머무는 태도이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변방에 머물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인 위치 지점이기도 할 텐데. 그 지점이 어떻게 이 세 사람에게 작동했는지, 그 결과는 제가 가늠할 수는 없지요. 사실 어렸을 때의 기억이라는 게 그렇게 많지 않잖아요. 톨스토이처럼 천재는 엄마 젖빠는 기억도 있다고 하는데. 사실 저는 멍청해가지고 초등학교 전에는 기억이 없거든요.

근데 최근 들어서 부산에 대한 지역 연구를 하면서, 부산 초량동 수정동 영주동에 대한 커뮤니티 조사를 3,4년 이상 했었어요. 하면서 보니까 제가 태어난 60년이라는 해가 한국 휴전 협정을 맺은지 7년밖에 안됬던 때더라고요. 당연히 부산이라는 도시가 아수라장일 수 밖에 없었을 텐데, 라고 생각하다보니까 어렸을 때의 기억이 다시 소환이 되었어요. 그러면서 생각해 보니까 어릴때 정말 저희 집 앞에 깡통 동냥하면서 깡통 두드리면서 “작년에 왔던 각설이”, 이게 무슨 사극에 나올 이야기같지만 그 기억이 나더라고요. 미시적 부분과 거시적 부분이 이런 데서 X, Y 좌표를 그리면서 만나는 거죠. 아 이때 초량이 이런데였구나.

그리고 제가 외조부님을 따라서 5살때부터 11살 때까지 구봉산을 매일 올라갔어요. 아침 5시에 깨워가지고 정말 죽기보다 싫었는데 구봉산을 매일 올라갔거든요. 그러면 자연과 산과 식물에 대한 기억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게 없거든요. 그래서 이게 이상한데 뭐지, 생각을 했었는데 그거에 대해 이전에는 의심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최근에 초량 리서치를 하면서 부산에 있는 작가가 리서치 결과를 내 보내주는데, 구봉산이 식목일로 인해서 나무가 식재된 게 70년대래요. 그러면 제가 어릴 적에 구봉산은 민둥산이었던거에요. 그러니까 다시 기억이 소환되면서, 아 내가 갔던 구봉산은 나무가 없었구나, 그니까 내가 산에 가서 거의 7,8년을 갔는데도 산에 정상에 올라가서 콩국 먹은 기억밖에 안나거든요. 식물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요. 최근에 들어서 아 이게 거시적 측면에서 부산이라는 도시가 거의 폐허화 되고 70년대 식목일을 통해서 대규모 식재가 일어나면서 지금은 구봉산이 나무도 많고 굉장히 깊은 산이 되었거든요. 그니까 초량 리서치하는 친구들이 자꾸 나한테 구봉산 식물에 대해서 물어보는거에요. 그런데 나는 식물에 대한 기억이 없거든요.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그 거시적 역사적 사건을 보면서 다시 이게 맞춰지는 거에요.

 

정성갑 모더레이터

[최성우 대표에게 질문]

대표님 가출도 하셨다면서요 중학교 때. 왜 하신 거예요.

 

최성우 대표

가출은 뭐, 우리 주변에 다 가출을 해서 자장면 배달도 하고. 저는 그렇게까지는 못했고 간이 작아서, 저는  자전거를 많이 타고 수정동까지도 타고 가고 그랬는데.

자전거가 집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빨리 도망칠 수 있는 수단이었어요. 그 때는 버스나 이런 걸 탈 수는 없었으니까 초등학교 꼬맹이가. 자전거는 합리적으로 논다든지 운동이라는 형태를 지녀서 타고 다니면 아무도 말을 안하거든요. 나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고 이 엄격한 집에서 도망칠 수 있는 수단이 자전거였거든요. 이 건물도 보면 자전거가 굉장히 많잖아요.

 

 

정성갑 모더레이터

[최욱 소장에게 질문]

소장님 유년기를 돌아보면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찍 올라오셨잖아요 그 전에 살던 주거 형태가 정서적 심리적 바탕이 되어서 오늘날 건축 언어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거든요. 소장님도 설계하시는 걸 보면 항상 빛과 그림자가 굉장히 좋기도 하고 그런 부분까지 신경을 써서 설계를 하시기도 하고. 유년시절에 거주하시던 주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그 주거형태가 오늘날 나의 건축 언어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최욱 소장

좀 긴 설명이 될 수 있는데, 제가 30대 초중반 때 서울 도시에 대해서 세미나를 한 적이 있어요. 제가 한시간 정도를 서울의 도시감각에 대해 이야기했었는데 세미나가 끝나고 났더니 김진애 박사가 깔깔깔 웃는거에요, 도시를 한 시간 동안 설명했는데 도시를 손끝도 안대고 설명을 한대요. 당신은 창 안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것 같은 사람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저는 그 말을 듣고, 내가 그런 특징이 있나, 하고 생각했었어요.

그러고 나서 제가 미국 뉴욕에서 차를 다섯 번 갈아타고 뉴햄프셔 주의 맥다우 콜로니에 갔었는데, 제가 그 때 한 작업이, 대부분의 예술가이든 건축가이든 어린시절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거든요, 그래서 저도 어린시절을 상상해봤어요. 어린시절에 내가 경험했던 공간을 다 나열해보기 시작했는데 공간들이 기억이 안나는 거에요.

그러다가 제가 2주 정도를 참선을 했었는데 갑자기 공간이 기억이 났어요, 환청, 그니까 뱃고동 소리가 울리면서 우리집 공간의 크기가 기억이 났어요. 일본식 집이었으니까 문을 옆으로 미닫이로 열었고, 다다미방이었고 복도가 있었고, 이런 것들이 기억이 나기 시작하더라고요.

감각이 느껴지는 건데. 제가 어렸을 적에 집에 대한 기억이 두가지 정도가 있어요. 하나는 제가 아파서 집에 오랫동안 있었거든요, 집에 오래있으면 바깥 소리에 굉장히 민감해져요. 옛날에는 이발도 이발사가 다녔거든요, 아이스께기 장사도 다니고. 그리고 세상이라는 것을 편집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바깥의 소리 때문에. 빛에도 굉장히 민감해지고. 세상이라는 것을 바깥에서 들리는 감성으로 세상을 편집했던 것 같고.

그리고 나서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위해서 초량동 산쪽에서 대표님 댁택있는데 그 근처로 내려왔는데, 이 집의 유형적인 형태는 저한테 영향을 지금까지 미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모 할머니 집이랑 우리 집이랑 붙어 있었는데 그 붙어있는 집을 텄어요. 마당이 세 개가 있었어요. 마당, 집, 마당, 집, 마당. 저는 그 유형학적인 형태가 저한테도 크게 영향을 끼친 것 같고. 그게 일본 식 집이었는데, 일본식 집은 나무가 까맣잖아요. 다다미가 깔려있고 복도 중심으로되서 방이 메달려 있지요.

그런데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에 와서 깜짝 놀랐어요. 한옥을 보고 어떻게 이런 집이 있냐. 정말 다른 집을 체험한 거에요. 저한테는 일본식 집이 우선적인 경험이었고, 한옥을 보고 놀랐고, 지금 제가 한옥을 손을 대기도 하는데 한옥이 사뭇 다른 면도 있어요.

 

정성갑 모더레이터

[최욱 소장에게 질문]

최욱 선생님 sns나 블로그도 안하시고 폐쇄적인 사람이신가요?

 

최욱 소장

제가 폐쇄적인 사람은 아니고요, 다만 이제 요즘 시대에 맞는 사회적인 컨택을 적게 하는 것 같기도 해요. 부암동 집이랑 바닷가 집이, 제가 경험한 한국의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중국 집들은 굉장히 열린 중정을 중심으로 폐쇄형으로 막고 있잖아요.  일본의 집들은 굉장히 큰 집이 많은데 한 지붕 안에 여러 다른  공간들이 모여있어요.

근데 우리는 한 공간이 하나의 지붕 아래에 있거든요. 그래서 집과 집 사이가 떨어져 있는데 떨어진 사이로는 빛이 있거나 자연이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건물을 정면으로 보고 걷지를 않는 것 같아요. 중국은 정면으로 걸을 수 밖에 없어요. 딱 중심이 잡힌 공간이니까 일본도 비교적 그렇고. 그런데 우리 같은 경우는 집과 집 사이가 떨어져있는데 건물의 정면성이라는 것은 우리가 대청같은 경우는 비어있잖아요. 그건 정면이라기 보다는 내부화된 외부공간이거든요. 그리고 사람의 눈이라는 것은 밝은 곳을 향하기 때문에 우리의 밝은 곳은 대청이나

사선으로 걸으면서 우리는 감성적으로 주변을 인지를 해요. 한국사람들이 감성적인 시각이 굉장히 발달한 민족인 것 같아요. 정면을 안보지만 다 느끼는 거죠. 그게 한국인의 감각인 것 같고.

그래서 제가 만드는 공간들은 우리나라 공간의 직접적인 반영은 아니지만 그런  체계를 만들고 있는 거거든요. 보면 편하다는 느낌이 들 수 있고. 제가 짓는 건물들이 화려하거나 하지는 않은데 거기 사는 사람들이 편하다는 얘기는 해요. 그 말을 들을 때 내가 만든 공간에 대한 쓰임이 제대로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언제 기회되면 저희 집으로 한번 모시겠습니다.

 

 

정성갑 모더레이터

[최성우 대표, 최정화 작가에게 질문]

두분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두분 다 굉장히 아웃고잉하시기도 하고 지면이나 화폭에 갇히시지 않는 분들이잖아요. 설치미술이든, 전시기획이든. 그런데 두 분다 회화를 전공하셨고 회화를 기본으로 하고, 최성우 대표님은 미술사도 전공하셨고. 그런데 얌전한 사람만이 미술을 하는 건 아니지만 화폭을 걷어차고 그 바깥의 것을 더 재미있고 즐겁게 할 수 있었던 배경에 혹시 60년대 부산의 야생성이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치는 것 같은지. 한말씀씩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최정화 작가

야생이라면 후각이 떠오르는데요. 눈으로 듣고 귀로 냄새를 맡아야 한다. 이건 항상 나오는 얘기인데. 저한테 부산, 경상남도는 냄새였어요. 묵히고 삭히고. 시장이라는 곳이 사실 물론 제일 먼저 시각으로 보지만 많은 감각들이 교차해서 들어가거든요. 거기를 통과하면서 제가 많은 감각을 겪었죠.

시장도 있지만 초량 달동네는 더 해요. 정말 엄마 젖 냄새와 젓갈 냄새, 똥냄새, 구린내와 분향냄새. 그러다가 갑자기 빨래냄새 이불냄새, 불 탄 냄새, 각종 냄새들의 골목. 특히 그 개천가에 살아본 사람들은 그 미끈한 냄새와 쉰내와 오만가지가 섞여있거든요. 그 옆에서 어릴 때 살다보니까, 그 때는 몰랐죠 지금에서야 알게 됐죠.

아까했던 질문과 굉장히 중요한, 야생, 야생.

어쩌면 그래서 제가 정상적으로 이쁜 꽃은 못보고, 넝쿨을 좋아하고, 꽃도 허접한 꽃들의 축제, 그게 사실은 제 말이 아니라 제가 인용을 하는데, 화엄, 잡화엄식. 화엄이라는 게 잡화엄식의 준말이에요. 화엄경의 본 언어가 잡화경이고. 제가 꽃나무를 만들고 과일나무로 만들고 이런 것이 다 그거 이겠죠. 근데 그 이전에 우리의 민화였고, 제가 만드는 것은 야생과 민화의 사고와 같다고 생각하고요. 그 배경이 된 것들은 사실, 부산 초량 뿐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시장도 마찬가지고 제가 밖에서 겪는 모든 경험들이, 혼종, 짬뽕, 케이오스모스의 경험들이 그 바탕이 되었죠.

 

최성우 대표

이번 토크를 준비하면서 60년 61년 63년 생이 같은 지역에서 태어나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연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하고 제가 한번 곰곰히 생각해본적이 있어요. 그러다 공통점이 하나 생각났어요.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이에요. 그 장소를 만들고. 저는 특히 크리에이터가 아니잖아요, 창작자가 아니고, 두분은 창작자시고, 저는 창작자와 함께 판을 만드는, 마당까는 사람이고 화장실 준비하고 청소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세명은 어떤 특장점이 있을까 봤을 때, 저는 기획자 치고는 장소를 찾아다녔고 지역 프로그램을 할 때에도 항상 장소를 우선시했거든요.

아마 그 기억들이 지금 최정화 작가님도 말씀하셨고 최욱 대표님도 말씀하신, 안에서 세상을 보는 태도, 골목에서 만났던 세상, 냄새와 공기감과 지저분함과 극단과 섞임과, 정제됨과. 적산가옥은 안에 들어가면 굉장히 정제된 공간이거든요. 근데 밖에 나가면 또 아수라장이고 골목은 미로와 같고. 이런 다양한 체험들이 장소와 지역에 대한 끝없는 집착을 가지고. 또 우리가 서울에 와서 살면서도, 어디서 무얼 하든지 간에, 새로운 장소를 만들고. 그런 것이 만들어진 베이스, 공통점이 아닐까라는. 뭐 억측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성갑 모더레이터

[최욱 소장에게 질문]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올라오셨잖아요. 초등학교 때 타향으로 오게되면 유년기이고 아무래도 감정의 지반이 약하니까, 이건 참 그립다, 이거는 먹고 싶다, 이건 참 좋았는데, 하는 그리운 것들이 생기기 마련인데. 혹시 초등학교 2학년 떄 서울로 올라오셨을 때 이건 적응이 안되네, 혹은 부산의 이건 정말 보고싶다 그립다 하던 것이 있으셨는지.

 

최욱 소장

적응 안됐던 건 날씨였고요. 그렇게 추운지 몰랐습니다 서울이. 도시에 대해서 한번 제가 아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거 이어서 얘기할게요. 부산은 어떤 도시냐면, 손가락 보이시죠. 부산 같은 경우에는 바코드 같은 도시에요 저한테는. 그니까 바다가 있죠, 항구가 있죠, 항구 뒤에는 시장이 있죠, 그리고 큰 도로가 하나 있고 그 위에 상가가 있고 주택가가 있고 산이 있습니다. 그러면 부산 같은 경우에는 짧은, 2km남짓한 순간에 한 대여섯개 레이어가 겹쳐 있는 거에요. 부산은 사실은 계란말이 비슷한 도시에요. 계란말이 만들 때 네모난 불판 쓰잖아요. 부산은 여기에 각각 레이어가 있는데 이걸 말아가지고 썰면 다 보이죠,. 그렇게 모든 게 혼성된 도시라는 생각이 들어요.

부산에서 그립다라는 건 영역이 없다, 영역이 없기 때문에 굉장히 짧은 순간에 굉장히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음식도 그런 것 같거든요. 음식도 사실은, 부산은 원래 없던 동네에요. 그니까 동래가 원 부산이었고, 일본 사람들이 임진왜란 때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부산의 조계지로 남아있던 게 원류거든요. 부산의 원래 특성 자체가 굉장히 특별한 장소에요. 그게 초량동에서 드러납니다. 초량동을 보면 굉장히 오랜 혼성 모방적인 사오백년의 역사가 보이거든요.

서울에 와서 느낀게 서울은 정말 신기하다 부산에 비해서. 부산은 옆으로 레이어가 있었는데, 서울 강북을 보면 산세 사이사이에 궁이 있습니다. 서울은 정궁이 두 개가 있는 곳이잖아요. 서울은 계란으로 치면 쌍계란 후라이에요. 왠만한 도시에는 궁이 한 개가 있는데, 서울은 경복궁 자체가 치우쳐 있거든요. 그래서 경복궁의 대칭점에다 창덕궁을 지은 것이거든요. 서울이라는 장소는 핵이 두개인 특이한 곳이에요. 쌍계란이랑 계란말이 도시가 다른데, 저는 항상 계란말이 도시가 그립습니다.

 

 

정성갑 모더레이터

[최정화 작가에게 질문]

선생님도 미식가이시잖아요? 부산에 특히 향토 음식이 유명한 것도 많은데. 나 이런 거 정말 좋아한다, 어렸을 때 참 맛있게 먹었다. 그래서 그런 기억들이 지금까지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친다 하는 이야기가 있으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최정화 작가

맛과 부산은 별개로 치고, 맛과 지구, 맛과 우주 정도면 될 것 같은데요. 다 통하는 거니까. 묵히고 삭히고가 젓갈 이야기고, 젓갈과 엄마 젖을 연결시켰고, 근데 제 작업에 플라스틱이 새거도 있고 썩은 플라스틱을 주워다가 한 것도 있어요. 그걸 공통으로 도금해서 하니까 그게 리움에 있는 그 덩어리고.

이번에 경상남도의 시장을 쭉 다니면서 느낀게, 시장은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파는 곳이에요. 너무 아름다워요 시장 자체가. 뭐 지금까지 봐놓고도 경상남도 답사를 많이 다니는 이유도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서고 그 지역의 공기를 느끼기 위해서 가는데 일주일에 한번씩 아직까지 가고 있어요.

누구나 맛있는 것 좋아하죠. 맛의 근본은 재료 아니에요? 근데 저 같은 경우는 재료가 인류세, 콘크리트와 플라스틱까지 저의 재료가 되어 버렸으니까, 콘크리트와 플라스틱, 자연재료 다 섞기 시작했고

맛 미 아름다울 미 같은 미죠. 그리고 두 언어가 하나의 미로 얽히는 것은 근본적인 동질성을 이야기하는 거죠. 이렇게 제가 작업을 하게 된 것도 짬뽕, 짬짬뽕을 만들어냈던 어릴 때 기억이겠죠.

 

최욱 소장

제가 어렸을 적에 우유를 안 먹고 자랐어요. 우유를 소화를 못시키기 떄문에. 그래서 제가 먹은 것은 말린 개구리 달인 물, 인삼만 먹었어요. 물을. 애들은 물이 싫잖아요. 그래서 제 주식이 아이스께끼랑 단팥죽이었어요. 어렸을 적에 서울에 올라왔기 떄문에 어른들이 먹는 음식은 기억이 안나고 팥빙수랑 단팥죽은 항상 기억이 나요. 지금도 좋아해요.

 

최성우 대표

부산은 사실 부산가면 부산음식 맛없다고 하는 사람 많잖아요. 우리 박상현 미식평론가도 와 계신데, 부산음식 최고 전문가인데, 부산 음식 이야기를 하려면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받으신 명란 있잖아요, 덕화명란이라는 곳에서 협찬받은 건데, 원래 명란이 젓갈이에요. 지금 저희가 먹는 저염명란은 젓갈이 아니잖아요. 원래 일본에서 처음 젓갈을 만드신 분이 일제 강점기 때 부산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초량 시장에서 조선명란을 먹어보고 너무 맛있어가지고 일본에 그걸 들고가서 상품화시켰는데, 일본 사람들은 짠 걸 선호 안하니까 저염명란이 된 거에요. 지금 우리는 일본이 명란의 원산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한국이 원산이죠. 이렇게 명란 안에도 부산의 혼종성이 드러나있는데, 똑같이 밀면, 돼지국밥, 오뎅에도 드러나죠. 그만큼 음식 안에도 일본과 한국, 피란 내려온 사람들과 부산 지역 이 모든게 섞여서 나타나고. 그건 좀 거시적 측면인 것 같고.

미시적으로 봐도 사실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니셨으니까, 중고등학교를 다녀보면 한 반에 부모님 고향이  부산인 사람이 거의 없어요. 서울도 서울 출신들이 많지 않잖아요. 그것처럼 한 반에 60명인 시절에, 한 40에서 45명이 대부분 서부경남, 주로  부산지역은 마산, 진주, 창원, 사천, 고성 이런데서 많이 왔고 삼량진 같은 데서도 많이 와서. 소위 그 촌사람들, 부산 사람들은 경남 사람들을 또 찐쌀이라고 부르거든요 촌사람들이라고. 그렇기 떄문에 서부경남 음식이 다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부산 음식 안에는 서부경남, 경북은 아니죠 경북은 대구를 중심으로 갔으니까, 서부경남과 일본, 이북에서 온 음식들이 다 섞여가지고 있기 때문에 음식에 대한 폭넓은 레이어의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고.

우리 외할머니 같은 경우는 지금도 저에게 미식의 기준인데. 조개를 쒜리쪼사가지고 된장 풀고 쑥 넣어가지고 끓여준 조개 된장국 같은 경우는. 조개살을 쒜리쪼사야 돼요 그냥 넣으면 안되고. 쒜리쪼사가지고 막 진물이 나올 때 도마에서 싹 쓸어가지고 같이 끓이면, 진한 조개국물하고 된장이 어우러지면서  어린 쑥 향이 들어가면, 상상만 해도 맛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런 기억들이 있고. 당연히 뭐 부산이 바닷가니까 너무 많은 기억들이 있죠.

 

정성갑 모더레이터

부산이 고향이 아닌 사람들은 경상도 사투리는 다 똑같은 것 같잖아요. 그래서 부산하고 대구 사투리가 어떻게 다른지? 약간 헷갈리기도 하고 잘 모르겠는데, 뭐가 어떻게 다른가요?

 

최성우 대표

저는 그냥 들으면 알고, 특별한 지점은 잘 모르겠어요.

 

정성갑 모더레이터

얘기 해주실 분 혹시 있으세요?

 

관객1

대구는 앞에 액센트를 붙여요 “대!구”, 부산은 뒤에 악센트를 붙여요. “부산~”

 

관객2

제가 부산에서 근무를 하다가 대구로 갔는데, 대구 사람인데도 대구에서 차별을 받았거든요. 부산 사투리랑 대구사투리랑 너무 다르거든요. 대표적인 게, 갈치를 부산에서는 “깔치”라고 많이 부르거든요. 경음을 많이 써요. 그런데 대구에서는 격음을 써요. “칼치” 그런 차이들을 가지고 있고요. 그리고 억양이 많이 달라요. 부산은 억양이 다이나믹한데, 대구는 앞에 악센트가 많이 들어가거든요, 그래서 말이 좀 세요. 그래서 대구는 격음을 많이 쓰고 발음들이 좀 셉니다.

 

관객3

경남은 단음, 경북은 장음. 경남은 “아이다” 그런데, 경북은 “아니~다” 길게 늘여서.

 

정성갑 모더레이터

인간성은 어떻게 다른가요? 어디가 더 좋나요?

 

관객3

모든 인간은 자기 고향을 좋아하기 떄문에, 경북은 싫고요, 경남 부산이 좋아요.

 

 

최정화 작가

고향이란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모든 인간이 고향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저는 고향이 없는 사람이거든요. 태어나기는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고향, 기억, 추억 같은 언어들이 다 저한테는 마이너스에요. 기억도 없고 추억도 없고, 심지어 국민학교 때는 전학가면 앞에 나와서 인사하고, 뒤에 가서 앉아서 애들이랑 안 놀고 밖에 나가서 혼자 놀고. 물론 저의 예술세계가 그 때 혼자 놀면서 만들어질 수 있는 세계였을 수도 있겠죠. 그러다가 이제 서울에 와서도. 저는 이런 말이 있는데, 자아가 완성되고 형성되는 것은 50대래요. 저도 이제야 조금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정성갑 모더레이터

[최정화 작가에게 질문]

특히, 다 그렇겠지만, 한국 사람들은 정착에 대한 집착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동란을 겪기도 했고

 

최정화 작가

집착이라는 표현이 너무 좋은데. 정착을 사실은 다 원치 않아요.

 

정성갑 모더레이터

고향이 나는 없다,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생활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시절이 결핍으로 남아있는지, 혹은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인지.

 

최정화 작가

저는 또 두 가지를 짬뽕할게요. 결핍과 풍요가 한가지의 다른 모습이죠. 실제로 제가 만들어서 잘 쓰는 말중에 “美不美不二”. 아름다울 미자를 쓰시고요 아닐 불자 아름다울 미자,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않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이런걸 겪게 되고 알게 된 게 시장이고, 어릴 때 전학 가서 아무 곳에서도 속하지 못했던 경험들 덕분이었죠. 방금 결핍이라고 이야기하실 때 결핍을 이야기하시면 안되고 결핍은 풍요로서의 결핍이에요, 풍요를 동반한 결핍이고 풍요가 없으면 결핍이 없어요.

 

 

관객4

저도 부산을 떠나온지가 20년이 넘었는데, 저는 본의 아니게 부산을 한 달에 한두번은 가요 그런데 갈 때마다 편하긴 한데 낯설어요. 내가 어렸을 때의 부산이 아닌 것 같기도 하면서 그러다가도 지나갈 때는 아 여기가 부산이었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최대표님처럼 많은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너무 많이 변화된 모습을 보니까 많이 낯설고. 부산 사람이 해운대 안 가잖아요. 해운대 바다는 이제 내 바다가 아닌거야. 차라리 멀치감치 동네에서 얼핏얼핏 나는 바다 냄새, 바다를 보지 않아도 바다를 즐길 수 있는. 저도 그래서 안 가본 동네를 많이 가고. 그래도 그 속에서 부산을 느끼고. 낯설지만 어쨌든 내 고향이니까 편안한 냄새를 가지고 공간을 따라가는 그런 여행처럼 부산을 가는데.

세 분도 부산을 자주 가실 수도 있고 또 생각하실 수도 있으실텐데. 정착을 안하셨으니까 고정적으로 가시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내가 부산을 갔을 때 어떤 공간, 어떤 가게, 특별히 부산에 갔을 때 많이 찾게 되거나 내가 여기 갔을 때 부산에 왔다라고 느끼시는 곳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최정화 작가

저는 바다와 빛, 거기서 생기는 난반사와 정말 뜨거운 용솟음. 그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같은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전 부산에서 비즈니스를 많이 했고, 하고 있고. 부산에서 조현 화랑을 건축, 조경, 총괄을 다 제가 했기 때문에. 그러면서 사방팔방을 많이 다녔죠. 아까 나왔던 높은 아파트의 어떤 집 이런 식으로. 그렇게 많이 다니면서도 제가 자주 갔던 곳은 자갈치였던 것 같아요.

 

최욱 소장

장소라는 것은 형태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제가 베니스에서 공부를 했었는데, 베니스는 몇백년 동안 거의 안 변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베니스는 안 변하는 도시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제가 베니스를 떠난 지 십 년 정도 지나고 나서부터는 도시가 완벽하게 달라지더라고요. 사람 때문에. 그러니까 떠난 지 몇 년 되었을 적에는 복사가게 아가씨도 그대로 있었고 식당 주인도 그대로 있었고. 그때는 그 도시가 그대로 있는 것 같았어요. 영원히 안 변하고. 그런데 십년 이십년 지나면 그 사람들이 거의 다 떠났거든요. 낯선 도시에요. 아마 모든 도시가 다 그럴 것 같고.

그런데 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감성적인 부분이 있을텐데. 그건 최정화 선생님과 비슷한 것 같아요. 저는 이제, 부산의 바다가 남쪽 바다잖아요. 그러면 햇볓이 남쪽에서 비추어서 사람 눈으로 들어오거든요, 동해바다와는 전혀 다릅니다. 햇볕의 각도 때문에. 그리고 부산은 옛날에 작은 집들이 많았기 떄문에 영도 이런데 가면 집들이 남아있잖아요. 골목을 걷다보면 옆으로 바다가 반짝반짝 들어와요. 저한테는 그게 부산의 인상적인 느낌이거든요. 그런 감성들은 계속 있는 것 같고. 사람은 변했지만, 사람들 에너지 같은 것도 계속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리고 부산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계란말이 같이 엮여 있는 것 있죠. 그 감성은 계속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장소라는 것은 눈도 못 따라가는 거고, 감성이나 질감 같은 것, 그것도 아직도 있는 것 같고. 그래서 그렇게 보면 사실 해운대도 여전히 부산인 것 같아요. 그게 새로운 형태지만 그 안에 있는 에너지나 이런 것들은 그래도 부산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최성우 대표

아마 비슷한 경험인 것 같은데요, 저는 큰 바다에 대한 기억이, 부산에는 없거든요. 저는 집에서 손바닥 만한 바다가 사이사이로 보였던 기억이 있고. 두분하고 마찬가지로 지금 흰여울마을이라고 하는 제2 송도를 간다든지 하면, 고등어 떼가 지나가는 것처럼 바다가 반짝반짝 거려요. 남해 밖에 없는 거잖아요. 동해도 없고, 서해는, 충청도 출신 없으시죠, 그게 뻘이지 바다가 아니잖아요. 저도 뻘을 좋아하는데, 대학교 1학년 때 mt를 갔는데 애들이 인천에 가더니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곳에 올라가서 바다다! 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가서 보니까 바다가 없는 거에요 뭐지 그랬더니 뻘이더라고요.

사람마다의 바다의 경험은 서해 동해 남해가 다르고, 각자 지역에 따라 다른 것 같은데 저한테는 바다가 조각 바다였고. 중학교 때 뒷통수 맞으면서 과외할 때 선생님이 집중 못한다고 때리면 맞는 순간 들면서 바다가 보이는, 이런 거거든요. 그러다가 옆 골목에 여학생이 지나가면 쳐다보게 되고, 골목 바다, 이런 레이어에 대한 기억들이 있고.

이게 최욱 소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부산의 정서와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기억과 가슴속에 남아있는 것 같아요. 부산이라는 도시가 도시 계획에 의해서 그게 훼손되고 있다는게, 그래서 아까 우리 말씀하신, 낯설다는 게, 저는 요즘 한달에 두번 정도 일 때문에 부산에 가는데. 갈 때마다 낯설어요. 스케일이 없어지고. 계란말이가 잘려가지고 분산되어 버리고 없어지고. 중앙 권력이나 정치적 논리에 의해서 그런 것들이 변형되고 왜곡되기 때문에 굉장히 낯설고 아쉽다는 지점입니다.

 

최정화 작가

저는 뭐 부산이어도 되고 아니어도 되고 어느 고향이어도 되고 어디에서 살든 상관이 없는데 비빔밥? 비빔밥도 고추장을 넣는 사람, 된장을 넣는 사람, 젓갈 넣는 사람, 아무것도 안 넣는 사람, 야채만 가지고 양념하는 사람. 근데 저는 제가 작업을 하게 된게 모든 비빔밥인 것 같아요. 그리고 한정식 밥상의 차림인데, 그 차림이 누가 차리느냐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근데 반찬은 다 똑같잖아요. 오늘 고향이라는 메뉴가 나왔을 때, 기억, 추억도 마찬가지고 그거조차 다 지워버렸을 때 나올 수 있는게 뭘까, 여러분들 각자의 기억이에요, 여러분들 각자의 마음. 세상의 예술은 여러분들의 마음이 만드는 거에요. 작가가 만드는 게 아니에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조각조각 난 바다를 말씀하셨는데, 부산도 조각이 났고, 서울도 조각이 났고, 모르겠어요 제가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될지.

 

최욱 소장

원래 부산은 도시가 형성될 수 없는 땅이거든요. 근본적으로. 태종대 보세요. 태종대에서 해운대에 이르기까지 사실 굉장히 급경사에요. 그래서 길이 메인 도로 하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일본과의 관계 때문에 항구가 생길 수 밖에 없었던 거에요.

그래서 원래 부산은 끊임없이 증식될 수밖에 없는 곳이었고. 아마 저희나 부모님 세대나 부산이 다 낯설거에요. 6.25가 되니까 산으로 집이 올라간 것은 굉장히 특징적인 현상이거든요. 그 분들한테 얼마나 낯설었겠어요. 그 다음에 6.25 끝나고 나서 산업화가 부산에서 많이 됐잖아요. 그때는 간척을 시작했어요. 그게 얼마나 낯선 풍경이겠어요. 간척한 풍경에 공장이 없어지고 큰 건물이 들어서기도 하고 조금 더 개발되기도 하고. 그래서 부산은 끊임없이 낯선 도시일 거에요. 그게 아마 부산의 본질일 것 같습니다.

 

최성우 대표

지난 번 토크할 때 부산교육대학교 전진성 교수님이 와서 한 말도 비슷한 논리인데. 부산이라는 자체가 사실 없는 도시였고 끊임없이 외세와 역사와 정치에 의해서 왜곡되었던 도시였다고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관객 5

안녕하세요. 북촌 한옥마을에서 옻칠공방 서로제를 운영하고 있는 나성숙 교수라고 합니다. 세 분께 질문이 있는데요, 컴퓨터, 자동차 다 똑같아지고 앞으로는 문화만이 남을 것 같아요. 그런데 문화도 전 세계가 똑같아지면 차별화될 수 있는 우리의 자산은 전통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세 분 다 부산에서 오셨는데, 부산에는 한옥이 없어요.

문화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선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미의식도 누가 리드해 가야 하거든요. 오늘 부산에 대한 정체성, 문화를 이끌어가는 것에 대해서, 전통에 대해서 한마디씩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최성우 대표

사실 전통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어려워지기도 하고 복잡해지기도 하는데. 사실 전통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 끊임없이 공통된 기억을 생산할 떄, 그게 굳어질 떄 문화가 되고 문화가 되면서 그게 전통이 되기도 문명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전통이라는 말만큼 위험한 말도 없다고 생각을 하고요.

부산에 한옥이 없다는 건 당연하죠. 왜냐하면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아무것도 없었잖아요. 부산포였고, 왜구들이 쳐들어오는데 바닷가에 살 수 없어요. 시칠리아 섬도 마찬가지거든요. 시칠리아 섬 하면 우리는 해양문화가 발달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산악문화가 발달했어요. 왜냐하면 바닷가는 해적들 때문에 위험해서 사람들이 살기가 어려워요. 부산이라는 도시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동래 산성있는 동래만 존재했기 때문에 부산에는 한옥이 있을 수 없죠. 대신 부산은 세 분이 다 경험한 적산가옥이 있거든요. 적산가옥이라는, 한옥보다는 훨씬 작게 분절된 공간에서 아까 최욱 소장님이 경험하신, 빛과 그림자, 냄새에 대한 것, 소리에 대한 것을 저희가 경험하고 살았던 것이죠.

사실 전통이라는 부분은, 저희 모친이 무형문화재세요, 저는 어쩔 수 없이 DNA에 전통을 꼬리표를 달 수 밖에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 전통에 대한 굉장히 큰  고민과 그게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그 지점에 대한 생각이 많은데. 전통을 박제화하고 시절과 시절로 묶는다는 거는 위험한 것 같고, 한옥이라는 곳이 없는 곳에서 한옥을 새로 짓는다는 것도 위험한 생각인 것 같고. 우리는 적산가옥이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자란 세대들이 어떻게 한국 전통하고 우리의 경험들을 잘 섞어서 전통을 계승한 새로움을 만들 수 있을지.

분명히 수천년 동안 가져온 것 전통 안에는 아름답고 우아한 세계가 분명히 있지요. 그런데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사회적 시스템 때문에 전통을 사람들이 멀리하고 두려워하는 건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생각하고요. 전통을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해서 전통이 지닌 아름다운 세계를 오늘날 동시대에 가져와야 된다고 저는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이라는 걸 어떻게 해답을 지어놓고 그게 전통이라고 규정하고 그걸 강제적으로 오늘날 소환해서 전통으로 만든다는 건 굉장히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최정화 작가

전통은 전해져 내려오고 통하는 거거든요. 어제랑 오늘이랑 내일이 투명하게 합쳐지면 전통이에요. 사실은 어제 오늘 내일이 없어요. 항상 현재일 뿐이에요. 어제는 있었던 현재고, 지금은 현재 사용하고 있는 현재고, 내일은 앞으로 있을 현재에요. 현재의 반복이에요. 그래서 전통은 현재에요. 아까 이야기했던 혼종, 짬뽕 오만가지 잡것이 섞여있는 이것을 아름답게 느껴서 아름답게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게 새로운 전통이 되어요. 그런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전통은 박제되고 쓰지 않고  박물관 안에 있는 것을 베끼는 걸 전통이라 그래요. 다행히 이 혼종된, 지금부터 느끼는 우리 모두의 자신감, 이게 앞으로의 전통이 되는 거에요. 저도 껍데기 전통도 좋아하고 냄새나는 전통도 좋아하고 다 좋아하는데, 그게 죽어있고 사용하지 않은면 끝난거에요. 여러분들은 지금 전통을 만들고 있는 현재를 살고 있어요. 항상 제가 이야기하는게, 어제 오늘 내일이 투명하게 결합되면 가장 아름다운 전통이 시작된다. 전통은 씨앗이 바위 속에서 자라나는 거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최욱 소장

저도 한옥에서 사무실을 시작했었거든요. 한국문화를 제가 너무 몰랐기 때문에, 책 봐서 아는 것도 아니잖아요. 살아봐야 한다라고 해가지고 21년 전에 북촌 한옥에서 사무실을 시작했기 떄문에 아마 선생님과 비슷한 입장일 텐데 제 생각만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

저는 요즘에 씽씽 밴드도 있고 이날치 음악도 있잖아요. 저는 이친구들이 굉장히 한국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85년도에 도서관에서 나오는데, 이탈리아에서, 어떤 분이 제가 한국인인걸 알고, 이 분이 현대음악 작곡가였어요. 제가 한국인인걸 알고 반가워서, 한국사람들 참 대단하대요. 음악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 서양음악은 하모니가 중심인데, 한국 전통음악은 하모니가 아니래요. 그 개념 자체가 다르대요. 한국음악은 음이 병치된대요. 음이 각 생명을 가지고 쭉 간대요. 한국의 궁궐에서 하는 게 정악이라고 하나요, 그것은 악기에 하모니가 없대요. 악기가 다 독주를 하고 있대요 . 악기가 병치하고 있대요. 그리고 그것을 선택적으로 다 듣는다는 거에요. 그래서 현대음악에서 굉장히 참고할 점이 많고 어떻게 그게 한국문화에서 나올 수 있는지 너무 궁금하대요. 저한테 물어보더라고요, 어떻게 한국은 그런 문화를 만들었느냐. 저는 그것 듣고 깜짝 놀랐어요. 저는 몰랐거든요 그 내용을. 그런데 오늘 주제도 혼종 혼합인데, 그 친구 이야기를 빼서 오면 이게 병치문화인 것 같아요. 우리가 지극히 병치 문화가 발달한 것 같단 생각이 들고 저는 그걸 이날치 밴드나 싱싱밴드에서도 발견을 하거든요.

그리고 저는 한국 문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싶냐면, 우리나라 한옥이라고 하면 한옥 창살에 기와를 통상적인 한옥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저는 한옥의 핵심은 목구조라고 생각합니다. 이 목구조가 중국, 일본과는 달라요. 목구조라는 게 가장 경제적인, 기본적인 단위인데, 우리는 이 목구조에 만든 사람의 마음이 보여요, 솜씨가 보이는 거죠. 목구조는 그러면 안되는 거거든요. 가장 기능적으로 잘라야 하는데, 대패로, 그런데 우리 목구조에는 솜씨가 있거든요.

서양 건축은 폐허가 되면 벽이랑 기둥만 남아요. 그런데 우리 건축은 바닥만 남는데, 이 바닥의 모습이 중국과 일본과 다르거든요. 저는 우리 건축의 생명은 독특한 목구조와 바닥 구조라고 생각이 들어요. 우리나라는 바닥 구조만 보면 공간이 다 보이거든요. 그리고 우리나라 바닥 구조는 특히 온돌문화 때문에 단면이 아주 복잡합니다. 우리는 집 짓는 에너지의 60프로를 바닥에 쏟아부어요. 그래서 우리는 바닥 자체도 건축물의 기초가 아닌 것 같아요. 건축물의 기초보다 조금 더 나와서 사실 그게 공간을 만들기도 하고 행동도 만들기도 하거든요. 대표적인 예가 우리나라 통도사일 것 같고.

우리나라 건축문화를 다른 식으로 해석해보고 싶기도 합니다. 형태적이고 시각적인 것 으로 접근하지 말고 좀 더 다른쪽으로 접근을 해서 미학적인 가치를 뽑아낸다면, 아마도 시각적인 쪽에서도 이날치나 씽씽밴드처럼 창의적인 게 나올 것 같다고 기대하고 있고, 그걸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관객

서울이나 부산 이외에 다른 도시. 여기가 정리되면 가고 싶은 곳이 있는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최욱 소장

장소란 곳은 자기 기억과 관련이 있잖아요. 저는 바닷가에 작은 절벽 위에 집이 하나  있거든요. 그런데 여기를 가려면 집이 15채 정도 있는 마을을 지나야 해요. 사람마다, 바다가 좋다 산이 좋다, 는 것보다도 자기가 바라는 컨텍스트가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저도 여러 군데에서 살았었는데, 오래간만에 서울에 왔는데 서울 강북 지역에서 예전 우리 집을 가려고 골목을 지나야 하는데 골목을 지날 적에 지날 적에 비디오가게, 만화방, 떡볶이 가게, 구멍가게 세탁소가 있는게 너무너무 그리운 거에요. 그래서 저는 강북을 못 떠나거든요.

그것처럼 바닷가 집도 어디를 선택했냐면, 제가 여행을 하는데 이탈리아 소렌토 밑에 작은 어촌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차가 아니라 도보로 가려면 절벽 위의 레스토랑을 통해서 마을로 들어가야 해요. 절벽이 아슬아슬 좁아서. 레스토랑을 통해 들어간다는 말이 얼마나 근사해요. 그래서 저는 만약에 장소를 하나 구하면 그런 장소면 좋겠다, 하는 마음에 로망이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장소를 찾은 것 같아요. 제가 찾은 장소는 고성이라는 바닷가에 있는 장소인데, 작은 마을을 지나면  절벽에 바다가 보이거든요. 그래서 강원도에서 저는 한달의 삼분의 일을  지냅니다.

 

최성우 대표

제가 프랑스 한 7년 반 살다가, 부산을 6개월 살다가 서울을 다시 왔는데,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한국 내에 다른 도시를 오는 게 아니고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그만큼 부산과 서울의 격차가, 지금은 좀 다르겠지만 제가 귀국했던 93년도에는 그 정도의 격차가 있었던 것 같아요.

부산에 살면서 여전히 계속 느낀 것은 어느 도시나 지역이 중요한 게 아니고 끊임없이 내가 중앙에 있더라도 변방으로 나를 보내는 태도가 중요했던 것 같아요. 지역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고 개인의 태도적인 측면이 있겠죠8. 얼마전에 여기서  전국 시각예술 비영리 전시공간 협의 좌담회를 하는데, 보안여관은 서울 중앙에 있고 경복궁 바로 옆에 있고, 어마어마한 중앙의 권력이 아니냐 하는데 저는 그날 정말 충격을 받았어요.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데, 저희들의 태도는 끊임없이 우리를 변방으로, 멋지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나 당연히 변방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고, 지오그라피칼하게 중앙에 있더라도 항상 변방으로 우리가 태도를 취해야한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아마 또다른 지역을 택한다면, 지역적인 문제는 아니고, 변방의 위치에서 좀 더 새로운 걸 해보지 않을까. 이런 지적을 너무 많이 받았어요, 보안여관은 서울의 중심에서, 미술계에서 이제는 메인 스트림에, 그런데 전혀 아니에요. 이런 이야기를 듣는게 불편하기도 하고. 끊임없이 변방에 위치를 시켜야 하니까, 언제가 무언가가 하나가 중앙화되고 집중화되면 그걸 부수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끊임없이 부수어야 해요. 그런 지역을 찾으려고 노력을 했고요, 그걸 지금 말할 수는 없고, 다음 지역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최정화 작가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그곳이 너의 고향이다, 라고 옛 선현들이 이야기를 하죠. 아까 어둡고 숲 속에, 그리고 그곳에 많지 않아도 다시 가고 싶은 곳. 근데 저는 어디 살고 싶으냐 하면 사대문 안에 살고자 했어요. 그리고 시장 근처에. 사실 낙원상가 밑에 낙원시장이 있고, 저는 90년대 초부터 살았으니까. 12층 15층 두 층에 제 사무실이 있었고. 제가 92년도부터 거기에 있었으니까. 지금은 서울문화재단에 제가 있던 사무실을 세를 줬어요.

지금 현재는 광장시장 앞에 있고요. 저는 시장 가까운 곳에 꼭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뭐 합리화일 수 있는데, 정말 맘먹고 나가면, 예를 들어 사람들이 아이디어가 없으면 어떡하냐, 시장 갔다오면 된다.

 

 

정성갑 모더레이터

네 오늘, 재미도 있고 깊이도 있고, 다 좋은 시간 가지셨으리라고 생각하고요. 앞으로 세 분 활동 하는 것 더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최성우 대표님께 마이크를 넘기겠습니다.

 

최성우 대표

아무튼 부산이라는 지역, 거기에서도 초량이라는, 정말 우연한 것 같아요. 누구 말마따나 도대체 60년대 초반에 초량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문화 예술계에, 건축에 최욱 소장님 같은 분이 나타나시고, 또 전 방위적인 멀티플레이어로서의 최정화님 이라는 작가가 나타나셨을까. 개인적 의문점이 이런 토크를 마련하게 된 것 같고요.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시고 많이 오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