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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_20150831

통제의 시대 녹여낸 ‘인터넷 암시장’

김여란 기자 peel@kyunghyang.com
입력 : 2015.08.31 21:45:08 수정 : 2015.09.07 10:23:37


ㆍ인터넷 블랙마켓… 서울의 보안여관 등 세계 도시 5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려
ㆍ저항의 한마당… ‘종북 좌파’ 가려내기, 사이버 비방소 등으로 “ ‘돌려줘’ 인터넷 자유”
ㆍ풍자의 놀이판… ‘미디어 비만’ 경고에 ‘혐오 칵테일’ 선보여 자기과시욕 비틀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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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달간 본인의 오줌, ‘#selpee’(셀카의 패러디)를 앰플에 담아 전시한 광고인 차재. 2. 8월29일 오후 경향신문 메인 홈페이지의 사진들이 애니메이션 세일러문 관련 이미지로 바뀌어 있다. 3. 감시를 이진수로 푼 뒤 춤으로 변환시킨 청개구리 공작소의 ‘컴퓨바디’. 4. 유상준의 ‘지켜보고 있다’ 스티커. 5 터무니상조회의 디지털 디바이스 추모 영정과 제단.

 

‘인터넷 블랙마켓(암시장)’을 아시나요.

‘몰카’가 많은 성인 사이트 ‘소라넷’의 최신 주소를 알고 싶다면? ‘인터넷 암시장’에서는 1000원만 내고 뽑기 1등에 당첨되면 가능하다. ‘네이버’ 메인 페이지를 내가 좋아하는 사진으로 채우고 싶다면, 3000원만 들고 ‘인터넷 암시장’을 찾으면 된다.

지난달 29일 밤, 서울 통의동 복합문화예술공간 보안여관에서는 독특한 문화예술 행사가 펼쳐졌다. ‘인터넷 블랙마켓’이다. 정치적 통제와 현 시장질서에 종속된 인터넷 세계에 애초의 자유를 되찾기 위한 저항과 풍자의 놀이판이다. 이날 암시장에는 미디어·사운드 아티스트, 디자이너, 인문학자, 영상작가, 건축가 등 모두 27개팀, 39명의 작가들이 참여해 인터넷과 연관된 유·무형의 사물과 개념, 행위를 판매하고 관련 퍼포먼스를 벌였다. 인터넷과 테크놀로지 신을 모시는 ‘일렉트로닉 굿’이 벌어지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인터넷 익스프로러(IE)’가 올해 생을 마감한 것을 환영하는 ‘IE 추모 컵케이크’가 팔리며, ‘애플 스토어’에서는 진짜 사과를 갈아 준 것이다.

■ 저항하라, 규제되는 현실에

웹상의 감시·통제에 맞서는 행위는 곧잘 정치적 비판으로 이어진다. 대통령 등 현실 정치에 대한 비방·풍자가 주로 인터넷 통제를 통해 제한되기 때문이다. 이날 예술창작그룹 ‘서울 익스프레스’는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흔들고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종북좌파를 가려낼 장치를 뜨거운 애국심의 결과물”로 준비했다. 500원을 내고 질문 10개에 답하면 자신이 ‘종북좌파’인지 확인할 수 있다. 카레 하면 일본인지 인도인지, 오마이 하면 ‘스쿨’이냐 ‘뉴스’냐, 같은 질문과 답이 간첩 여부를 결정해준다. 그러나 ‘간첩/친노 종북좌파/종북좌파/친노 좌파/좌파/정상인’으로 구분되는 결과는 사실 ‘랜덤’이다. 서울 익스프레스의 전유진씨(34)는 “인터넷 댓글에서 ‘좌파’에 관한 실랑이가 벌어지고 누군가를 좌파로 지목할 때 맥락도, 논리도 없는 경우가 많다”며 “이 같은 풍경을 풍자했다”고 말했다.

미디어 아티스트 전석환씨(38)는 1000원만 내면 누구든 익명으로 비방할 수 있는 ‘사이버 비방소’를 만들었다. 그러나 욕을 쓰고 나면 바로 ‘불법·유해 정보 사이트 차단’ 화면으로 전환된다. 전씨는 “적정선은 필요하지만 인터넷에 익명성이 보장돼야 한다고 본다. 전 세계에서 한국·중국 정부의 제약은 유독 심하다”고 밝혔다.

■ 풍자하라, 부조리적 사회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자기과시의 욕망을 비트는 기획도 눈에 띄었다. 광고인 차재씨(36)는 한 달간 채집한 자신의 오줌, ‘#selpee’(셀카의 패러디)를 앰풀에 넣어 전시·판매했다. 앰풀과 포장 박스의 크기는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적합하게 맞췄다. 각 오줌들에는 ‘아침부터 혼난 날’ ‘엄마가 보고 싶었던 날’ 등 짤막한 일기와 사연이 적혀 있다. “모두가 예쁘고 럭셔리한 장소에서의 나를 찍어 인터넷에 올린다. 그건 욕망의 투사이고 왜곡일 뿐 본질이 아니라고 본다. 오줌은 내가 몇 시간 전 먹고 마시고 호흡하던 그 상태로 추출된다. ‘셀피’를 통해 ‘자아표현’을 넘어서 ‘자아판매’로 이어지는 현상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디자인그룹 ‘디디고고’의 윤지희씨(24)는 자신이 SNS에 올린 게시글들을 모두 출력해 몸에 덕지덕지 붙이고 암시장을 돌아다녔다. 그는 “우리는 눈뜨면서 자기 전까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스스로를 노출한다. 그게 쌓여서 ‘미디어 비만’이 됐다는 걸 보여주려 한다”고 말했다. 놀이 활동가그룹 ‘땡땡땡 공작’은 ‘소라(넷) 뽑기’와 ‘혐오 칵테일’을 선보였다. 인터넷 혐오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자’ ‘게이’ ‘레즈비언’이 혐오칵테일의 베이스이고, 각각에 ‘오리지널/연애/평등/판타지’ 등을 가미할 수 있다. ‘여자+오리지널’은 김치녀칵테일, ‘게이+연애’는 항문섹스 칵테일, ‘레즈비언+판타지’는 포르노칵테일이 되는 식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 문제 없는 두 가지가 합쳐져 어떻게 혐오의 아이콘이 되는지 보여주는 셈이다.

인터넷 암시장은 2012년 일본에서 처음 시작했다. 일본 뉴미디어 아티스트 ‘엑소니모’가 만든 애플리케이션이 판매에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애플 앱스토어 등록을 거절당한 게 계기다. 이후 비슷한 일을 당한 이들이 구글과 애플 중심의 온라인 플랫폼에 종속되지 않는 프리마켓을 결성하자는 논의가 일어났고, 엑소니모를 주축으로 ‘100년된 비밀결사’를 표방하는 조직 ‘IDPW’가 결성됐다. IDPW는 ID와 비밀번호만 있으면 누구나 접속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올해는 서울, 뉴욕, 린츠, 타이창, 상파울루까지 세계 도시 5곳에서 3주간 동시다발적으로 열린다.
이날 서울 인터넷 암시장에는 1000여명이 다녀갔다. 관람객 윤석희씨(25)는 “시대를 생생하게 반영하는 기획들이 좋았다”며 “특히 심각한 문제를 직설적으로, 희화화시켜 풀어내는 것도 흥미롭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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