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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_2011.9월호

걸어다녀본 후 쓴 경복궁 서촌 화랑가 골목길

여성중앙 | 입력 2011.09.21. 11:34


 

궁의 서쪽 풍경은 사뭇 달랐다. 삼청동이나 가회동의 화려함은 없었다. 그래도 내실 있는 갤러리들이 속속 들어선 데는 이유가 있었다. 쉬 허물고 새 건물을 올리는 조급증이 이 동네에는 통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보안 하나는 확실한, 경복궁 서촌 화랑가를 걷고 또 걸었다.

등잔 밑이 어두웠다. 아니, 청와대 밑이 어두웠다. 권력의 가장 가까운 곳에 “생활하듯 예술 하는 재미로 조용히 살고 싶다”는 사람들이 오종종하게 모여 있었다. 2008년으로 기억한다. 인사동은 오래전에 관광지로 변했다. 갤러리에서 고요를 찾기보다는 인파에 익숙해지는 편이 빨랐다. 여기에 임대료마저 크게 올랐다. 동십자각에서 시작해 가회동으로 이어지는 북촌 거리도 인사동의 변화를 따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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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밀려난 미술계 사람들이 대안으로 선택한 곳이 경복궁 서촌이었다. 최고 권력이 코앞에 있는지라 개발에 제약이 많았다. 그래서 안심이었다. 쉬 허물고 새 건물을 올리는 조급증이 이 동네에는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쪽의 광화문(光化門)과 동쪽의 건춘문(建春門)은 ‘빛’을 품고 ‘봄’을 품었지만, 서쪽 돌담 동네는 예외였다. 가을을 그리는 영추문(迎秋門) 건너에 있는 보안여관만 해도 그 역사가 80년이었다. 미당 서정주가 1936년에 투숙하며 김동리·김달진 등과 동인지『시인부락』을 만든 유서 깊은 목조 건물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 대견했다. 보안여관은 실험적인 전시 공간으로 거듭나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중이다.

“몇 년 새 이 동네에 갤러리가 부쩍 늘었어요. 교통이 좋으면서도 한적하거든요. 청와대가 가까워서 보안도 잘되고(웃음). 조용한 분위기에서 작품을 관람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이 찾으세요. 분위기 좋은 카페도 많고.”

서촌으로 갤러리를 옮긴 까닭을 묻자 비슷한 답변이 돌아온다. 인사동에 있던 갤러리 아트사이드는 작년에 통의동으로 이사를 왔고, 강남에 있던 갤러리 시몬도 올해 통의동에 재개관했다. 대림미술관, 진화랑 정도이던 것이 브레인 팩토리, 류가헌, 쿤스트독, 사루비아다방, 아트家 등으로 그 수가 크게 늘었다. 여기에 자하문로 건너에 있는 통인시장이 공공 미술 프로젝트로 새롭게 단장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갤러리를 이정표 삼아 통의동, 창성동, 효자동 일대를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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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보안여관은 전시장이 곧 작품의 배경이다.2_진화랑에 있는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은 이정표 구실을 한다.3_통인시장도 학생들 작품으로 재단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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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아트사이드(왼쪽)와 갤러리 시몬(오른쪽)은 최근 1~2년 사이 서촌에 재개관했다. 이 거리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갤러리들이다.

다시 서촌에서 갤러리 아트사이드, 갤러리 시몬

늘 진화랑 골목에서 시작했던 것 같다. 일본의 ‘엽기 땡땡이 할머니’ 작가로 통하는 쿠사마 야요이의 세라믹 작품인 ‘노란 호박’이 이정표였다. 붉은 벽돌로 지은 진화랑을 둘러보고 골목으로 빠져나오면 갤러리 아트사이드와 갤러리 시몬이 엇갈리게 마주 보고 있는 삼거리에 닿는다.

아트사이드는 인사동 시절부터 유명했다. 2001년에 중국 현대 미술을 이끌고 있는 아방가르드 작가 5인전을 기획해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중국 현대 미술 열풍을 주도했던 장샤오강, 팡리쥔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잇달아 선보이며 ‘중국 작가 전문 갤러리’로 탄탄한 입지를 굳힌 곳이다. 베이징의 798예술구에 분관을 세우고 한중 작가 교류전을 열기도 했다. 아트사이드는 작년 12월에 ‘이상한 곳’이라는 개관전 타이틀로 통의동 시대를 열었다. 1층과 지하를 돌며 도자기를 평면에 옮긴 이승희 작가의 담백한 세라믹 작품을 둘러보고 나왔다.

길 건너에 있는 갤러리 시몬은 8월 한 달간 소장품전을 열고 있었다. 1층은 회화 작품, 2층은 미디어 아트 작품 위주로 전시되어 있었다. 반짝이 스팽글(시퀸)로 회화와 입체의 느낌을 동시에 낸 노상균 작가의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단색의 오일 스틱으로 전통 수묵화의 느낌을 낸 문범 작가의 그림도 두 점이나 걸려 있었다. 9월 22일부터 문범 작가의 개인전이 예정돼 있다.

시간은 사진 위주로 흘러, 류가헌

갤러리 시몬 앞에 난 골목을 따라 류가헌으로 향한다. 이곳은 산 사진으로 유명한 이한구 작가와 글쟁이 박미경 작가 부부가 운영하는 ‘사진 위주’ 공간이다. 갤러리와 카페를 겸한 건물의 입구는 골목 안쪽에 있다. 부부는 폐가로 방치된 한옥 두 채를 얻어 공들여 수리하고 ‘함께 흐르면서 노래하는 집’이란 뜻으로 류가헌(流歌軒)이란 이름을 붙였다. 건물 한 채는 작업실로 쓰고, 한 채는 카페와 사진 전시장으로 꾸몄다.

아카이 릴테이프 데크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요제프 쿠델카의 사진집을 펴놓고 과테말라 커피의 신맛을 음미한다. 한가로운 목요일이다. 김민곤 작가의 ‘공감각세포’전도 구경하고, 툇마루에 앉아 한옥 처마가 그린 사각형 마당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도 구경한다. 눈과 귀와 입이 즐거운 ‘공감각’의 시간들이 여유롭다. 한쪽 서가에 10년간 꾸준히 대나무 사진을 찍어온 김대수 작가, 펄펄 뛰는 한국인의 기(氣)를 사진에 녹여낸 이갑철 작가의 사진집이 보인다. 원하면 살 수도 있다. 작년 겨울,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유명한 강운구 작가의 칠순 생일을 맞아 후배 사진가들이 ‘강운구를 핑계 삼다’는 제목의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이래저래 사진가들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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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보안여관 앞을 지나던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안을 흘깃거린다. 아무나 편하게 투숙하면 된다.2, 3_사진 전시 위주로 운영되는 류가헌이다. 한옥에서 사진집을 들춰 보는 즐거움이 남다르다.

건물이 곧 작품, 보안여관

서촌 길은 안전하다. 이 보안(保安)여관 때문에라도. 보안여관은 2004년에 팔리고 나서 몇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북촌에 이어 서촌 개발 붐이 일 때였다. 너도나도 낡은 건물을 사서 밀어내고 새 건물을 지어 임대 사업을 벌일 때였다. 운 좋게도 메타로그 아트서비스의 최성우 대표가 여관을 인수했고, 2009년부터 건물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과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실험적인 전시 공간으로 키워냈다. 보안여관에는 박병래 작가의 ‘째보리스키 포인트’전이 열리고 있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이 미국에 진출해서 만든 영화 ‘자브리스키 포인트’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군산을 배경으로 찍은 영상들이에요. 외계인 ‘째보’가 일제 강점기의 적산 가옥, 미 군정기에 기지촌 여성들이 머물던 타운, 새만금 간척지 등을 돌아보는 설정으로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추적했죠. 실제로 군산에 가면 금암동에 째보 선창이란 곳이 있어요. ‘째보’는 언청이라는 뜻이죠.” 맥북을 보며 여관을 지키고 있는 사람의 설명이 예사롭지 않다. 그가 바로 박병래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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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갤러리 팩토리 앞 서촌 거리는 한적해서 좋다.2_갤러리 쿤스트독의 전시 작품들이 늘 난해한 것은 아니다.3, 4_통인시장 서울수산물회센터와 BYC속옷가게 풍경이다.

상업성을 떠나 대안을 고민하다, 스페이스 15, 갤러리 쿤스트독, 갤러리 팩토리

정부중앙청사 별관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곳 영추문로 주변에는 상업 화랑과 미술관의 ‘대안’을 고민하는 공간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대안 공간은 비영리로 운영된다. 상업 화랑처럼 미술품을 판매하거나 작품을 소장하기 위해 작가를 선정하지 않는다. 작가의 실험성과 창조성에 주목하고, 주제나 장르에도 구속이 덜한 편이다.

2003년 3월에 개관한 브레인 팩토리는 터줏대감으로 통한다. 올 6월에 조르지오 모란디의 정물화를 14명의 국내외 작가들이 재해석한 기획전 후로는 잠잠했다. 시간과 공을 들여 다음 전시를 준비 중이란 소리였다. 오숙진 디렉터가 이끄는 브레인 팩토리의 전시는 특별하다. 역량 있는 젊은 예술가를 발굴해 일대일로 전문 큐레이터를 붙여 기획전을 진행한다. 국내 화랑가 사람들 입에서 “브레인 팩토리를 거쳐 간 젊은 작가들은 언젠가는 뜬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 오숙진 디렉터가 “판매될 수 없는 미술 형태들을 수용하려는 공간”이라고 부른 곳들이 이 주변에는 많다.

스페이스 15, 갤러리 팩토리, 갤러리 쿤스트독을 차례로 돌아본다. 스페이스 15는 가가린 책방 맞은편 골목에 있다. 전시 제목이 동네와 잘 어울린다. ‘사소한 거'(Trifle)는 2인전이다. 페인팅을 하는 미국 작가 로리 라루소, 섬유 예술을 전공한 김민선 작가의 팝 아트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기획자가 미술 작가란 점도 특이하다. 박성연 작가는 “30대 초중반의 젊은 작가 전시가 많다. 같은 일을 하는 작가가 기획을 맡으면 서로 말이 잘 통해서 좋다”고 한다. 기 싸움을 벌일 일도 없고, 전시 노하우를 공유하기도 편하다. 스페이스 15는 1년에 한 번 공모를 통해 작가를 선정하고 2개월에 3회꼴로 전시를 이어간다.

갤러리 팩토리는 길가에 있다. 사진가 이종명이 운영하는 빈티지 가구 카페인 ‘mk2’ 바로 옆이다. 삼청동에 있다 2005년 가을에 이곳 창성동으로 이전했다. 현대 미술의 흐름에 맞는 국내외 작가들의 기획전을 진행하고, 워크숍이나 관객 참여 프로그램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날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신지은 작가의 작품이 전시 중이었다. 이케아 조립 선반으로 보이는 규격화된 틀 안에 18세기 민화에 나올 법한 물고기나 조각보 문양을 수납한 세로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갤러리 쿤스트독은 mk2 바로 옆 골목에 있다. 쿤스트(kunst, 예술)라는 이름에서 보듯 독일 유학파들이 뜻을 모아 운영하는 곳이다. 다들 직업이 따로 있고 시간을 내어 갤러리 운영에 동참한다. 실험적이고 난해한 개념 미술 쪽 성향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누가 드나들든 신경 쓰지 않고, 사무실 한쪽에서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 모습이 ‘쿨’해서 보기 좋았다. “몇 년 전만 해도 동네 아저씨 같은 분들이 다녀갔는데, 요즘은 잘 차려입은 여성분들이 문득문득 찾아오네요.” 그 말에 웃음이 났다.

재래시장을 둘러보는 소소한 재미, 통인시장

자하문로 건너 60년 역사를 자랑하는 통인시장으로 향한다. 서울예고?추계예대?상명대 학생들이 팀을 꾸려 ‘시장조각 설치대회’란 이름으로 한 달간 가게를 꾸몄다. 그 과정에 시장 상인들이 동참했고, 현역 미술가 6명이 멘토로 나서기도 했다. 작품의 아이디어는 상인들의 이야기에 기초한다. 우리농산물유통엔 사과나무 벽화가 생겼고, BYC 속옷가게 앞에는 메리야스와 내복 입은 친구들이 포즈를 잡고 있다. 서울수산물회센터 저울 뒤에는 낚시질하는 아이가 턱을 괴고 앉아 있다. 가게의 역사와 상인들의 꿈이 오롯이 담긴 작품들이다.

중앙전주반찬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패러디한 영화 간판이 걸렸다. 주인 부부의 웃는 얼굴 옆에 ‘반찬과 함께 사라지다’는 문구가 써 있다. 왕년에 가수가 꿈이었다는 가게 주인 이정순씨의 애창곡도 알 수 있다. 현숙이 부른 ‘내 인생에 박수’다. 겉모습의 화려함보다는 이야기를 좇으며 내실을 기한 흔적이 엿보인다. 가게마다 특성을 살려 재래시장답게 꾸며놓았다. 사람들은 기름떡볶이 한 접시에 쉬어 가며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 자리에 앉으면 서촌의 속살이 보인다.

동네의 성격을 말하다, 가가린 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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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린은 오프라인 회원제로 운영되는 책방이다. 회원들이 헌책에 값을 매겨 책방에 내놓은 뒤, 책이 팔리면 수수료를 떼고 수익금을 가져가는 구조다. 유통망 확보가 어려운 일인 출판사의 신간도 있고 잡지나 음반, 빈티지 장난감도 볼 수 있다. 가가린은 동네 이웃인 mk2, 디자인 스튜디오 워크룸, 갤러리 팩토리, 건축가 서승모씨가 공동 출자로 세웠다. 대형 음식점이 점포 한 곳과 임대 계약을 했다는 소문이 돌자 십시일반 돈을 추렴해 가게를 빌린 것. 자본이 몰리면서 상업화로 치달을 것을 경계한 동네 이웃들의 아이디어가 빚은 공간이다.

기획_성재경 사진_김진희, 이진하, 강민구

여성중앙 2011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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