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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사진201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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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과 골목마다 옛 서울의 정취와 여유로움이 숨쉬는 서촌이 뜨고 있다. 도심과 가깝지만 시골처럼 한적한 분위기가 있고 교통도 편리해 주말의 산책코스로 인기다. 특히 통의동은 특색 있는 갤러리와 카페가 옹기종기 모여 있어 사람들의 발걸음을 유혹한다. 상업화와 번잡함으로 문화거리의 고유한 매력을 잃어버린 인사동과 삼청동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글 | 월간사진 박지수 기자
정취 있는 골목과 한옥, 살아남은 아이러니한 공간

통의동은 효자로와 자하문길, 율곡로와 영추문길에 둘러싸인 약 1,300평 면적의 동네로 한옥과 좁은 골목길이 남아있어 옛 서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두 사람의 어깨넓이 정도의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있고, 길고양이들이 한가로이 담벼락을 지키며, 철대문 앞에 놓여있는 연탄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통의동은 마치 김기찬 사진의 한 장면 같다. 통의동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청와대 때문이었다. 청와대 아래에 위치해 군사정권 시절에는 극심한 건축규제와 주민통제를 당했다. 옥상에 올라가 고추를 말리거나 집을 수리하는 것까지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오랜 시간 통의동 에 대한 권력의 통제가 지금에 와서는 통의동이 옛 모습을 지키도록 도와준 셈이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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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만 20곳, 영추문길 사이 빼꼭히 자리한 이색공간

타임캡슐처럼 시간이 멈춘 통의동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주택일색이었던 통의동에 갤러리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1972년 진화랑을 시작으로 2002년에 옛 말레이시아대사관 건물에 사진전문 미술관인 대림미술관이 들어왔고, 2003년에는 브레인팩토리 갤러리가 들어와 실험적인 젊은 작가들에게 전시기회를 제공하는 대안공간의 명소가 되었다. 그 다음 쿤스트독 갤러리, 갤러리팩토리, 스페이스15번지 등 크기는 작지만 젊은 작가를 발굴하고 후원하는 대안공간의 성격이 강한 갤러리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았다. 작년 2월에는 팔레드인서울 갤러리가 개관했고, 11월에는 인사동에 있던 아트사이드 갤러리가 통의동으로 옮겨왔다. 현재 통의동에는 영추문길을 중심으로 20여개의 크고 작은 갤러리가 자리잡고 있다. 갤러리 이외에도 디자인 공방 워크룸과 아트가구 카페 MK2, 인테리어북 카페 B612, 헌책방 가가린, 디저트 카페 디어플라잉팬 등 특색 있는 공간들이 영추문길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대부분 옛 서울의 분위기와 향수를 간직한 통의동 골목에 매력을 느껴 이곳으로 들어왔다. 워크룸의 박활성 에디터는 “디자인 사무실을 내기 전부터 통의동을 좋아했다. 서울에서 이런 골목동네를 이젠 보기 힘들다. 그리고 무엇보다 임대료가 쌌다”면서 통의동에 들어온 이유를 말했다. 삼청동이나 인사동에 비해 싼 임대료는 통의동을 선택하는 현실적인 이유다. 그러나 오래시간 묵혀온 문화적 전통과 분위기도 함께 통의동을 택하는데 한몫했다.

조선시대 중인의 문학과 정체성이 태동한 땅

통의동은 조선시대 양반과 양인(일반 백성) 사이의 계급인 중인이 살던 서촌 지역의 하나다. 중인은 의관이나 역관 등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아전 등 행정직에 종사해 지배층의 말단을 차지했다. 통의동과 창성동 지역은 조선시대 궁궐에서 쓰는 음식재료와 땔감 등의 생필품을 관리하는 사재감이 있었다. 그리고 각종 공방들도 많았고 내시들도 이 일대에서 살았다. 또 궁궐 관료들의 출퇴근로였기 때문에 상권이 발달하고 활기를 띠었다. 중인들은 통의동을 포함한 서촌지역에서 생활하며 조선 후기로 오면서 상당한 자본을 축적했다. 그리고 양반에 견줄만한 문화적 역량을 쌓았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여항문학이다. 여항(閭巷)이란 도시의 골목길이란 뜻으로, 조선 선조 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중인출신의 하급관리와 평민들에 의해 이루어진 문학을 말한다. “통의동은 조선시대 사회와 문화예술의 저변을 형성했던 중인들이 살던 곳으로 서울의 정체성을 대변하며 지금도 그것이 전해지는 곳이다.” 홍순환 디렉터(갤러리 쿤스트독)의 말처럼 통의동의 영추문길이 새로운 문화거리로 자리잡는 것은 통의동의 역사와 정체성과 부합하는 일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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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추문길 찾아보는 이색 문화공간

통의동에는 영추문길을 중심으로 이색적인 공간들이 많다. 골목과 골목 사이에 숨어있거나 골목길 한켠에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얌전히 있어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 작고 아담하지만 각자의 개성을 빛내고 있는 이색공간들을 찾아가본다.
보안여관
영추문 맞은편의 통의동 2-1번지에 위치한 보안여관은 메타로그 아트서비스가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보안여관은 1930년대 문을 열어 시인 서정주가 하숙하며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등과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을 탄생시킨 유서 깊은 곳이다. 또 청와대와 가까워 군사독재 시절에는 청와대 직원들이 주고객이었고, 경호원 가족의 면회장소로 활용됐다. 80년 동안 영업해온 보안여관은 2004년 문을 닫고 2006년 9월경에 재건축이 결정돼 철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한국, 일본, 독일의 작가들이 8개월간 보안여관에서 기거하며 작업과 전시를 진행하면서 장소의 가치를 인정받아 재건축 대신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됐다. cafe.naver.com/boani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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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쿤스트독 컨테이너박스
통의동의 진화랑과 아트사이드 사이에는 이상한 컨테이너박스가 하나 있다. 컨테이너 전면은 유리로 되어 있고 내부에는 조명과 설치미술품이 놓여있다. 작년부터 쿤스트독갤러리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성 전시공간이다. 쿤스트독의 디렉터 홍승환은 “아직도 갤러리와 미술관의 문턱이 높고 수동적으로 관객을 기다리고만 있다. 좀더 적극적으로 관객에게 다가갈 필요가 있었다”면서 컨테이너박스는 갤러리와 관객 간의 쌍방향소통을 위한 공간이라고 밝혔다. 컨테이너박스는 통의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현재까지 24차례 전시가 열렸다. www.kunstdo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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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공방 워크룸
워크룸은 출판사 안그라픽스 출신의 디자이너(박활성, 김형진, 이경수)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공방이다. 주로 출판물 디자인을 하며 젊은 작가들의 도록을 실비로 제작해준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도록 디자인과 함께 디자인 전시기획도 병행한다. 최근에는 영추문길의 갤러리와 카페 운영자들과 함께 헌책방 가가린을 공동운영하며 소규모 출판물을 발행하는 출판사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www.workroo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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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북 카페 B612
영추문길에 들어서면 흰색건물에 노란색 간판이 눈에 띄는 카페 B612가 있다. 어린왕자가 사는 소행성 ‘B612’에서 이름을 따온 카페는 이름만큼이나 감성적인 분위기다. 책장에는 인테리어, 건축, 마감재 등 다양한 디자인 책으로 가득하고 인테리어 재료의 샘플도 있다. 카페는 디엔씨인테리어에서 운영하며 카페 뒤편에 사무실이 있다. 빈티지풍의 테이블과 소파, 가구들은 인테리어회사가 운영하는 카페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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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카페 스프링 컴, 레인 폴
아트사이드 맞은편에는 낡고 오래된 2층 건물이 있고 입간판에는 ‘Spring Come, Rain Fall’이라 써있다. 이곳은 문구 브랜드인 오체크(O-Check, 공책)의 사무실겸 카페. 옛날 양옥을 개조해 1층에는 카페를 2층과 3층은 사무실로 활용하고 있다. 빈티지풍의 문구로 유명한 오체크의 사무실을 엿볼 수 있고, 입구와 계단에는 오체크의 문구와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매달 일러스트와 사진 등 전시가 이뤄져 카페 벽면에서 오리지널 원화와 프린트를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다. www.cafe-spr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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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 카페 디어플라잉팬
이태원과 가로수길에서 입소문타고 유명해진 브런치카페 디어플라잉팬이 작년에 통의동에도 문을 열었다. 영추문길의 중간쯤에 가구카페 MK2와 헌책방 가가린 옆에 조용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이곳은 디어플라잉팬 특유의 손으로 그린 듯한 날개달린 프라이팬 로고를 달고 손님을 맞는다. 작년 10월에 다시 문을 열고 브런치 카페에서 디저트 카페로 변신을 꾀했다. 매일 직접 만든 케이크와 쿠키 등 여러 디저트를 골라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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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없는 파스타식당, 디미
브레인팩토리갤러리 아래에는 간판없는 파스타식당이 있다. 푸드 스타일리스트였던 이희재와 안희윤이 3년 전에 이곳에 자리를 잡고 생면파스타를 전문으로 하고 있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통의동에 들어온 이들은 ‘디미’라는 식당이름이 있지만 굳이 간판을 만들지는 않았다. “우리가 들어오기 전에 카페가 있었는데 간판이 따로 없었어요. 저희도 그냥 간판을 달지 않았아요. 그때는 돈도 모잘랐구요.(웃음)” 이제는 간판없는 집으로 유명해진 이곳은 파스타를 비롯해 이탈리아 요리가 주메뉴이며 식당 한켠에는 주방용품과 식기를 진열해 놓고 판매한다. www.cafedim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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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갤러리자인제노 관장 이두선

절묘한 장소 이점과 규제가 만든 문화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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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의동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삼청동에 있다가 재작년에 통의동으로 옮겨왔다. 임대료 때문이었다.(웃음) 삼청동의 임대료가 치솟아 어디로 옮길지 궁리했다. 우선 인사동과 가까워야 했다. 삼청동도 사간동도 인사동과 가까워 그 영향권 아래에서 발달한 것이다. 그리고 작품을 감상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한적한 분위기여야 했다. 통의동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내보니 통의동의 매력은?
옛날 동네와 골목의 모습이 그대로 있다. 서울 4대문 안에 이런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통의동이 마지막 보루라는 생각도 든다. 지내다보니 교통도 편리하다. 사실 삼청동은 지하철역에도 멀고, 늦은 시간에는 버스 타기도 힘들다. 경복궁역이 가까워서 좋고 주차공간도 있어 손님을 초대할 때도 좋다.

요즘 통의동에 갤러리와 카페가 많이 생겼다.
땅값이 많이 올랐다.(웃음) 얼마 전에는 인사동의 아트사이드도 옮겨 왔고, 시몬갤러리와 대전의 이안갤러리도 건물을 사고 통의동에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다. 인사동과 삼청동이 포화상태라 통의동으로 몰리는 것 같다. 갤러리가 생기면 다음은 카페가 생기기 마련이다. 갤러리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차 마시고 이야기할 공간이 필요해서다.

이런 변화에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전적으로 비율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삼청동은 갤러리 숫자에 비해 카페와 식당이 너무 많다. 상대적으로 통의동은 갤러리가 많이 생겨 다행이다. 그리고 통의동은 청와대나 관공서 건물이 많아 매매가 쉽게 이루어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개발억제가 된다. 삼청동처럼 개인이 건물을 사서 새로 짓는 일이 쉽지 않다. 갑자기 인사동이나 삼청동처럼 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통의동의 바람직한 변화는 어떤 모습인가?
무엇보다 갤러리가 많이 생기는 것이다. 아직도 갤러리 수가 부족하다. 갤러리가 많이 생겨서 작가들이 전시할 기회가 많아져야 비싼 작품 값도 떨어질 것이다. 작가마다 1년에 개인전 한번 하기 어렵기 때문에 작품가격을 올려치는 것이 미술계의 현실이다. 적당한 가격으로 자주 전시해서 많이 파는 것이 미술시장에 좋다. 미술거리가 상업화되는 것은 그림보다 스파게티와 장식품이 더 잘 팔리기 때문이다.

* 본 기사는 <월간사진> 2011년 1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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