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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닷컴 매거진_2014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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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 조선 시대 지적도와 가장 유사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지역이 있다. 경복궁 서쪽 돌담길을 따라 낮은 가옥들로 이뤄진 서촌이 그곳이다. 서촌 지도를 다시 펼쳐 보니 많은 것이 달라졌다. 가옥과 골목은 예전 그대로인데 더 풍성해졌다. 바뀌는 것이 아니라 빼곡히 채워지는 중이다.

 

경복궁 서쪽 마을 ‘서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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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를 서촌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중인들이 머물고, 이후에 이상, 윤동주, 이중섭 같은 예술가들이 머물렀던 곳.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는 개발제한으로 묶여 있어 오히려 그 덕에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다.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로 나와 효자로를 따라 걸으면 서촌 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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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은 현재와 과거를 함께 품는 공존의 공간. 종로구 누하동‘옥인길’에 위치한 한지 공예 전문점 서촌 마루(노란 불빛 비치는 가게)에서 100여m 걷다 보면 오른쪽에 박노수 종로구립미술관이 나온다. 옥인길 초입에서 수송동 계곡까지 가는 길에 만나는 카페·밥집들은 정겹기만 하다.

케리 美국무장관이 찾았던 기름 떡볶이

처음 서촌(행정구역상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에 가게 된 건 순전히 금천교시장의 ‘기름 떡볶이’ 때문이었다. 아니, 그 떡볶이를 팔고 계신 할머니를 보고 싶었던 게 먼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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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인시장 기름 떡볶이
개성이 고향인 김정연(98) 할머니는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볼일을 보러 잠시 남한에 내려왔다. 전쟁은 야속하게 고향으로 가는 길을 막았고 세 아이도 다시 볼 수 없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40여년 전 이 골목에서 처음으로 ‘기름 떡볶이’를 만들어 팔았다. 개성 음식 가운데 소고기 볶음 요리라는 게 있다. 명절엔 여기에 떡을 넣어 먹는데 이 음식에 착안해 탄생한 게 바로 기름 떡볶이다.

김 할머니의 기름 떡볶이는 고추장 대신 간장으로 간을 하고 고춧가루와 깨, 다진 파, 된장 등을 넣어 만든다. 투박하지만 다정한 고향집의 내음이 풍긴다. 짭조름함과 고소함이 혀를 감싸고 도는 그 정반합의 맛! 금천교 시장에서 멀지 않은 통인시장의 명물로 꼽히는 ‘기름 떡볶이’의 원조가 바로 이 집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평생 번 재산을 헌납해 어려운 학생들을 도운 할머니는 여전히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다. 할머니의 가게는 아직 간판도, 전화도, 추위나 더위를 피할 벽도 없다. 서촌의 명물이 된 김 할머니지만 언제라도 할머니를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요즘은 몸 상태가 좋으실 때만 나온다. 행운과 연이 닿아야만 원조 할머니의 떡볶이를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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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선 경복궁역에 내려 2번 출구로 올라오면 시장통 입구가 보인다. 적선동에 있어 적선시장이라고 하는데, 예전엔 이곳에 개천이 흐르고 금천교라는 다리가 있어 금천교시장으로도 불렸다.

시장통은 길지 않지만 맛집이 많다. 푸짐하거나 신선한 안줏거리가 대부분이고, 최근엔 젊은 입맛에 맞는 맥줏집도 한둘 생기는 추세. 퇴근길 직장 남녀의 핫 플레이스다.

서촌의 시작은 경복궁 서문 영추문이다. 여기에 서면 봉우리가 단정하게 다져진 산 하나가 보이는데 이 산이 인왕산이다. 봉우리를 따라 걷는 이 일대가 다 서촌이다. 행정구역상 청운동·효자동·통인동·체부동·옥인동·사직동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청와대 인접 지역이라 개발에 제한이 있었다. 덕분에 지적도상 조선 시대에 가장 근접한 모습을 가진 몇 안 되는 동네로 남아 있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도 지난 13일 서촌을 찾았다.

존 케리 국무장관은 금천교시장 김 할머니의 기름 떡볶이가 아닌, 금천교시장에서 멀지 않은 또 다른 전통시장인 통인시장의 기름 떡볶이였지만, 그렇다고 서촌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막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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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오어진 기자

젊은 장사꾼, 젊은 입맛이 어울린 공간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와 죽 따라 걸으면 서촌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 하나가 또 나온다. 통인시장 탄생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주변에 주택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전형적 서민형 골목 시장이다. 2005년 아케이드로 정비한 이후 시장 특유의 분주하고 왁자지껄한 맛은 사라졌지만 물건과 인심은 여느 시장과 다름없다. 이 시장의 도시락 투어라는 것이 재미있다. 시장 안에 있는 고객행복센터에서 도시락통을 사면 엽전을 주는데 이 엽전으로 시장 곳곳 음식을 사 도시락통을 채우면 된다. 반대편 입구로 나와 작은 정자를 만나면 시장 구경도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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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가 장기 투숙했던 통의동 보안여관
북촌이 사대부의 거주지였다면 서촌은 역관이나 의관, 조선시대 중인들이 살던 곳이다. 다양한 실무를 담당하던 그들은 신분은 낮았지만 지식과 교양을 두루 갖추었으며 예술과 문학에 출중했다. 17세기 숙종조 무렵 중인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여항문학이 등장하는데 그 주요 무대가 지금의 서촌이다.

서촌의 선조들이 만들어낸 문학적 기류는 그대로 후대 문학으로 이어졌다.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이상 등이 서촌에서 문학 활동을 이어나갔다. 스물두 살의 서정주는 1936년 종로 통의동의 한 여관에 짐을 풀고, 동년배 문인들을 모아 문학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었다.

영추문 맞은편 길에 보이는 붉은 벽돌집이 서정주가 장기 투숙했던 ‘보안여관’이다.
80여년 세월을 고스란히 이겨낸 채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현재는 여관이 아닌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래 용도는 잃었지만 예술혼은 여전히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 통의동은 보안여관을 중심으로 소규모 갤러리와 한적한 카페들이 혼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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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슬로우브레드에버
인왕산을 따라 걷는다. 고개를 들면 가장 크게 보이는 산이 인왕산이다. 9번 마을버스가 이 길로 다닌다. 통인시장부터 마을버스 종점까지 두 정거장 정도 거리인데 걷기를 더 추천한다. 산을 향해 깊어지는 골목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가는 길 따라 만나는 소소한 상점과 식당은 최근 생겨난 곳이 많은데 저마다 독특한 개성과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심야 식당을 닮은 누하우동(누하의 숲), 건강한 빵을 만드는 슬로우브레드에버, ‘젊은 한식’을 맛볼 수 있는 남도식당 등은 서촌의 트렌디한 지도에 빠트릴 수 없는 명소들이다.

이 길에 보이는 옥인상점은 서촌 토박이인 설재우의 아지트다. 어린 시절 자주 들르던 오락실에 터를 잡고, 지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서촌의 인포메이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서촌방향’의 저자이기도 한 그를 만나 수성동 계곡으로 가는 방향을 안내받았다.

마을버스 종점, 인왕산 아래에 다다르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수성동 계곡은 도심 한복판에 숨은 멋진 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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펍 바르셀로나
이 지역의 진짜 이름은 물이 내려오는 곳을 뜻하는 ‘상촌’이다. 우리말로 하면 ‘웃대’라고도 한다. 물로부터 시작되어 맑게 흐르는 동네. 겸재 정선이 ‘장동팔경첩’에 담을 만큼 아름다웠던 수성동 계곡에 서서 물소리에 귀 기울여본다.

소란스러운 폭포 소리가 경복궁까지 들린다 하여 지어진 수성동이라는 이름은 1969년, 옥인아파트가 들어서며 물소리를 잃었다. 아파트 철거 후, 겸재 정선이 남긴 그림을 토대로 계곡을 복원했다. 폭포처럼 많은 이야기가 소란스럽게 쏟아진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다시 한번 들러 추사 김정희처럼 ‘수성동 우중에 폭포를 구경’해볼 것이다. 역사와 트렌드가 공존하는 공간들을 만난다. 걸음을 잠시 멈추면 조선시대의 풍경 안에 머물러 쉴 수 있는 곳. 우리가 오늘도 서촌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이유다.

서촌 핫플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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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장사꾼 감자집’ 감자와 크림맥주
청년장사꾼 감자집(구 열정 감자)

감자튀김으로 유명한 곳. 잘생긴 청년들의 열정이 먹자 골목의 풍경도 바꿔놓았다는 평이다. ‘감자 팔아 장가가자’ ‘감자살래 나랑살래’ ‘손님이 짜다면 짠거임’ 등 스태프들의 유니폼에 적힌 문구도 위트 넘친다. 2인 세트(감자 중간 사이즈, 사이드 메뉴, 크림맥주 L사이즈 2잔) 1만3000원 (070)7778-4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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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 마을버스가 다니는 길로 걸어 수성동 계곡을 향해 가다 보면 만나는 빵집. 초콜릿 바게트, 캄파뉴, 휘낭시에 등 다양한 종류의 빵을 맛볼 수 있다. 오후 9시에 문을 닫지만 3시쯤 대부분 빵이 팔려 예약을 해두는 편이 낫다. (02)734-0850

서촌 계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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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 직송 제철 해산물을 만날 수 있는
서촌계단집
금천교 시장의 계단집은 문어 숙회 등 해산물 안주를 기본으로 하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벌교 왕꼬막, 여수 피조개, 통영 석화 등 산지에서 직송되는 제철 해산물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이곳만의 큰 장점이다. 무한 리필되는 홍합탕이 이 집 최고 메뉴라는 손님도 많다. 별미인 해물라면 7000원. (02)737-8412

박노수 미술관

지난가을 문을 연 종로구립미술관은 남정 박노수 화백이 실제 살았던 집이다. 화가의 평생 화업과 고미술품 1000여점, 40년간 꾸민 정원을 감상할 수 있다. 한국화의 거장인 박노수 화백은 탤런트 이민정의 외할아버지로 뉴스를 장식하기도 했다. 전시만큼 아름다운 건 유려한 건축물이다. 한옥과 양옥을 절충한 이 가옥은 1937년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했다. 월요일은 휴관. (02)2148-4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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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하우동의 바나나튀김
누하의 숲(누하노모리)

한국인 남편, 일본인 아내가 내놓는 일본 가정식. 작은 식기까지 모두 일본에서 공수해 왔다. 메뉴는 딱 3개로 주기적으로 바뀌는 코스 A와 B 정식을 먹을 수 있고, 나머지 하나는 테이크아웃할 수 있다. 녹차 바바로아, 매실 푸딩 등 일본식 디저트도 맛볼 수 있다. 치킨남방정식 1만2000원. (02)733-5632

오 쁘띠 베르

이상의집 맞은편에 위치. 케이블 채널 ‘마스터셰프코리아’ 시즌1에서 준우승한 박준우 셰프가 운영하는 디저트숍이다. 타르트가 대표 메뉴. 테이블이 여섯 개뿐인 작은 공간이다. 인기인 레몬타르트는 7000원. (070)8231-2199

대오서점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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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오서점 카페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헌책방. 1951년에 문을 열어 지금까지 한곳을 지켰다. 책방 주인인 권오남 할머니는 학창 시절의 추억을 찾아오는 사람들, 어떻게 알고 이곳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이 마냥 반갑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안고도 문을 닫을 수 없던 이유다. 이제는 아들이 서점 옆에 작은 카페를 만들었다. (02)735-1349

미술관옆작업실

인테리어 디자이너 출신인 여주인이 홀로 가게를 고치는 데 6개월이 걸렸다. 전기부터 목공, 칠까지 전부 혼자 했다. 이 공간은 전적으로 주인의 공간이다. 그리고 이곳은 정말 작업실이다. 공간을 구경하고 소품을 구입하거나, 카페처럼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마실 수 있다. 대신 메뉴는 하나 뿐. ‘진짜진짜핫초코’는 우유에 벨기에 초콜릿을 직접 녹여 만든 순결한 핫초코다. 그 외의 것은 ‘진짜진짜’ 가미하지 않았다. (070)7527-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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