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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벼에서 쌀로, 다시 밥과 막걸리로 … 사라진 1500종, 토종 벼의 귀환을 꿈꾸다_20171029

[중앙선데이]

아트스페이스 보안1942의 2층 전시장에 토종 벼들이 예술적 오브제가 되어 놓여있다.

아트스페이스 보안1942의 2층 전시장에 토종 벼들이 예술적 오브제가 되어 놓여있다.

전시가 시작되는 보안여관 입구

전시가 시작되는 보안여관 입구

2011년부터 토종 벼를 심어온 이근이 우보농장 대표

2011년부터 토종 벼를 심어온 이근이 우보농장 대표

“지구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볍씨는 1998년과 2001년 충북 청원군에서 출토된 소로리 볍씨입니다. 약 1만5000년 전 것으로, 중국보다 4000년 앞서는 것으로 분석됐죠. 한반도에서 재배된 토종 벼는 1500종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이 토종 쌀인가요?”

통의동 보안여관 프로젝트전 ‘먹는 게 예술이다, 쌀’ 가보니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과 아트스페이스 보안 1942에서 ‘먹는 게 예술이다, 쌀’(10월 16일~11월 4일)을 시작한 최성우(57) 대표(일맥문화재단 이사장)는 기획 의도를 묻는 말에 이렇게 되물었다. “젊은 작가들과 기획 아이디어를 찾다가 토종 벼를 키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깜짝 놀랐다”는 최 대표는 생활밀착형 예술에 초점을 맞추는 ‘OOO가 예술이다’ 시리즈의 첫 번째 프로젝트로 토종 벼를 점찍었다. 그리고 2011년부터 토종 벼 되살리기에 힘써온 우보농장의 이근이(50) 대표 농부를 중심으로 예술가와 학자, 요리사들과 함께 머리를 맞댔다.

그 결과 ‘벼-쌀-밥’의 순환 구조를 예술가들의 감각으로 풀어낸 전시 ‘흔들리며 서서; 교감식물’(11월 4일까지)을 비롯해, 토종 쌀과 밭작물을 거리에서 파는 세모아 토종 마켓(21일), 생태인류학적 관점에서 쌀과 인류 문명의 상관 관계를 풀어보는 좌담 ‘교감하는 생태와 문명’(28일), 교육 프로그램 ‘토종 쌀과 풍토·시간·사람’(28일)이 진행됐다. 11월 1일 오후에는 토종 쌀과 작물을 인근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두 쉐프(두오모의 허인, 디미의 이희재)들의 요리로 맛볼 수 있는 테이스팅 워크숍이 이어질 예정이다(문의 boan1942@gmail.com). 21일 오후 열린 개막식에 중앙SUNDAY S매거진이 다녀왔다.


이소요 작가가 만든 토종 벼 ‘흑갱’의 표본. 작품 사이즈가 가로 83·세로 161cm로 토종 벼가 사람 키만하다.

이소요 작가가 만든 토종 벼 ‘흑갱’의 표본. 작품 사이즈가 가로 83·세로 161cm로 토종 벼가 사람 키만하다.

 송호철 작가의 18분 30초짜리 영상작업 ‘벼 꽃과 한국의 토종 벼’

송호철 작가의 18분 30초짜리 영상작업 ‘벼 꽃과 한국의 토종 벼’

김준 작가의 ‘층간-소음’(2017). 이곳에서는 눈을 감고 가만히 귀 기울여 볼 일이다.

김준 작가의 ‘층간-소음’(2017). 이곳에서는 눈을 감고 가만히 귀 기울여 볼 일이다.

아트스페이스 보안 1942 2층 전시장에서는 밥그릇, 대나무 도시락 등을 볼 수 있다.

아트스페이스 보안 1942 2층 전시장에서는 밥그릇, 대나무 도시락 등을 볼 수 있다.

21일 오후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 앞. 한복을 차려입고 경복궁과 서촌을 오가던 사람들이 거리에 펼쳐진 좌판에 연신 고개를 기웃거린다. 통통한 봉투에 든 도정한 쌀들과 누룽지에 관심을 보이자 이근이 우보농장 대표가 설명을 시작한다. “이것은 자광도(紫光稻)라는 토종 쌀인데, 밥을 지으면 자주색이 아주 반짝반짝하죠. 임금님께 진상하던 겁니다. 처음엔 조금씩만 넣어 드셔보세요. 풍미가 색다르실 겁니다.”

보안여관 안으로 들어가니 토종 벼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 펼쳐진다. 송호철 작가의 비디오 영상 ‘4는 88이 아니다’는 이양기와 트렉터 등 4번의 기계 작업으로 마무리되는 현대 농법과 여든여덟 번의 손길(米)이 필요하다는 전통 자연 농법을 비교해 보여준다. 안 쪽에는 김준 작가의 ‘층간-소음’이 설치돼 있다. 한아름 볏짚 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가만히 서 있으면 벌레 소리, 바람소리가 들린다. 토종 벼가 자라는 논에서 작가가 채집한 소리들이다. 헛간 같은 느낌의 보안여관 분위기와 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삐걱대는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왼쪽에 이소요 작가의 거대한 표본 액자가 관람객을 맞는다. ‘흑갱’이라는 이름의 이 토종 벼는 키가 무려 150cm에 달한다. 최 대표가 설명했다. “저렇게 키가 큰 데 잘 쓰러지지도 않는다고 해요. 잡초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키를 키운 것 같아요. 게다가 이게 가장 큰 품종도 아니래요. ‘북흑조’는 다 크면 180cm나 되지만, 아직 자라고 있어서 작가가 표본 작업을 못 하고 있답니다.”

오른쪽 공간에서는 이 작가가 똑같은 크기로 정갈하게 표본 작업을 해놓은 토종 벼 55점이 한꺼번에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가위찰·각씨나·까투리찰·궐나도·금나·돼지찰·대관도·대추벼·버들벼·앉은뱅이·여명·장끼벼·적토미·졸장벼…. 세상에, 토종 벼의 품종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절로 나오는 감탄은 곧 ‘왜 이걸 여태 모르고 있었나’라는 한탄으로 이어진다.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고 1911년부터 13년까지 조사한 『조선도품종일람』에 따르면 당시 벼 품종은 모두 1451종. 식량 수탈을 위해 일본 도입 품종을 심으면서 이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그나마 남아있던 것들도 1970년대 식량자급을 내세워 개발된 ‘통일벼’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토종 벼에는 길들지 않는 자연미가 있죠. 토종 볏논에 기계가 들어가면 꼬이고 휘말려 고장이 날 정도입니다. 때문에 기계로 1~2시간이면 할 수 있는 일을 하루 종일 걸려 일일이 손으로 작업해야 하죠. 그런데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들 덕분에 토종 벼는 멸종 위기에서 다시 부활한 것입니다.”

“지역마다 다른 토종 벼, 이제 부활할 때”
이소요 작가의 토종 벼 표본 55점이 설치된 2층 전시 공간

이소요 작가의 토종 벼 표본 55점이 설치된 2층 전시 공간

김준 작가의 ‘층간-소음’. 스피커 위에 볍씨를 발아시켰다.

김준 작가의 ‘층간-소음’. 스피커 위에 볍씨를 발아시켰다.

이끼 속에 볍씨를 넣은 김지수 작가의 ‘공중정원’

이끼 속에 볍씨를 넣은 김지수 작가의 ‘공중정원’

이근이 우보농장 대표는 원래 문화판에서 일했다. 문학동네 기획실장, 대중문화비평지 『리뷰』편집장, 대중문화웹진 ‘컬티즌’ 대표를 지냈다. 2000년 주말농장을 시작하면서 우리 농산물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됐다. 토종 벼의 경우, 고양시 벽제동 아파트 단지 앞 1000평과 파주시 2000평 등 총 3000평의 논에 키우고 있다.

질의 :토종 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응답 :“17년 전 경기도 고양에서 처음 농사를 했을 땐 밭작물 중심이었다. 운 좋게 이웃 할머니로부터 씨앗도 받고 퇴비 만드는 법도 배우며 농사법을 제대로 익힐 수 있었다. 그때 개량종과 토종 씨앗의 차이를 알게 됐다. 개량종은 한 해밖에 못 심는다. 만약 그 씨를 받아 이듬해에 심으면 원래대로 나오지 않고 변형된다. 쉽게 말해 상품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토종은 그렇지 않다. 똑같은 것이 나온다. 볍씨 몇 알을 심으면 똑같은 쌀이 1000배로 늘어난다. 씨앗이 그만큼 중요하다.”
질의 :토종 벼의 씨앗은 어떻게 구했나.
응답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일할 때 계간지 ‘귀농통문’을 펴내면서 전국의 토종 농부를 취재한 적이 있다. 그 분들께 조금씩 얻고, 토종종자보존단체인 씨드림의 씨앗나눔행사에서도 얻었다. 흙살림 토종연구소에서도 20여 종을 구했다. 2011년에 고양시 벽제동에 3평짜리 논을 마련해 30여 종을 심었고 이듬해 3000평 논에 심을 정도의 분량을 수확했다. 정부 유전자원센터에 450종 정도 있는데, 지난해 여기서 20종을 얻기도 했다. 올해는 100종을 심었다. 그런데 토종 벼를 심다 보니 궁금증이 생겼다.”  
질의 :어떤 궁금증인가.
응답 :“이름에 대한 것이었다. 누가 임의로 지은 것이 아니라 농부들이 지은 것이다. 버들벼는 키워보니 진짜 버드나무 같더라. 족두리를 쓴 색시 같다고 해서 붙여진 각씨나, 붉은 돼지의 등에 비유한 돼지찰도 재미있지 않나. 졸장벼는 키가 무릎 아래 정도로 가장 낮은데 짱짱한 맛은 있어 이렇게 해학적으로 붙였구나 싶었다.”  
질의 :벼를 키워보니 어떤가.
응답 :“벼라는 식물이 진짜 아름답다. 색깔도 정말 예쁘다. 자연이 만든 작품이다.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것도 예술가들이 이걸 보고 감흥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또 지금 먹고 있는 쌀이 무슨 품종인지도 모르는 현실에서, 우리에게 이런 토종 벼가 있었고, 자기 입맛에 맞는 쌀 하나 정도는 갖고들 있으면 하는 희망도 있다.” 
질의 :토종 벼의 특징은 어떤 것인가.
응답 :“야생성이 강하다. 대신 화학 비료나 농약에 취약하다. ‘아키바레’로 알려진 추청(秋晴) 같은 종자는 외려 비료에 길들여져 있어 안 주면 수확량이 떨어지는데, 토종 벼는 비료를 많이 쓴 논에 심으면 그냥 쓰러진다. 퇴비 등 유기농 방식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사진 왼쪽부터 기획자 신현진 어시스턴트 큐레이터·김이박 작가·우보농장 이근이 농부·최성우 보안여관 대표·송고은 객원 큐레이터·김준 작가

사진 왼쪽부터 기획자 신현진 어시스턴트 큐레이터·김이박 작가·우보농장 이근이 농부·최성우 보안여관 대표·송고은 객원 큐레이터·김준 작가

질의 :토종 벼를 심는 분들은 많은가.
응답 :“전국에 30여 분 계신다. 3년 전부터 ‘토종 벼를 재배하는 농부들’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함께 연구하고 있다. 대규모로 생산하자는 건 아니다. 자급용 소규모로 키울 수 있는 지역 농부를 찾고 있다. 값이 비싸지만, 선호하는 품종이 생긴다면 계약 재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질의 :판로가 있나. 
응답 :“도시농부 시장에 가져다 판다. 혜화동 마로니에 공원과 서울숲 등에서 한 달에 두 번 마르쉐가 열리는데, 직접 가서 설명하고 판매한다.”  
질의 :밥맛은 어떤가. 
응답 :“어떤 벼든 자기만의 특징이 있다. 밥맛도 천차만별이다. 자광도의 경우 백설기로 만들어 먹으니 카스테라 같고 맛있더라. 어떤 맛인지, 어떻게 해야 맛있게 먹을 수 있는지, 특징과 방법을 찾아내는 게 과제다. 그래서 요리사, 음식평론가들과 테이스팅 워크숍을 꾸준히 하면서 데이터를 만들고 있다.”  
질의 :쌀소비가 점점 줄고 있다.
응답 :“그래서 최근엔 막걸리 연구도 열심히 하고 있다. 1907년부터 35년까지 국내 주류업에 관한 일제의 공식기록을 편역한 『조선주조사(朝鮮酒造史)』를 보면 당시 주막 개수가 12만 개로 나온다. 10리 단위로 있었다는 뜻이다. 이 정도면 지역마다 술이 달랐다는 뜻이고 술 문화가 꽃을 피웠다는 얘기다. 그 술 문화를 계승하고 싶다. 그럼 쌀 소비도 자연스럽게 늘어날 것이다. 제대로 된 쌀로 빚은 제대로 된 막걸리가 나온다는 것이니까. 막걸리라는 말은 아무렇게 막 걸렀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막 걸렀다는 의미다.”
질의 :구체적인 계획이 있나. 
응답 :“한반도를 16개로 나누고 각 지역의 대표적인 토종 쌀로 막걸리를 만들 생각이다. 흑갱으로 만들면 흑갱 막걸리다. 이번에 16명을 선정해 각각 다른 쌀을 4kg씩 주었다. 누룩은 똑같이 주었다. 11월 11일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리는 마르쉐에서 선보일 예정인데, 과연 어떤 맛이 나올지 매우 궁금하다.”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통의동 보안여관

원본 링크: https://news.joins.com/article/2206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