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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magazine_2013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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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건축의 부도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김수근이 설계한 사옥의 미래를 염려했다. 새 것만을 선호하는 서울에서 옛 건물의 가치는 너무나 쉽게 평가절하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주름이 진 뒤에야 더 깊은 표정이 완성되듯, 도시의 풍경은 역사가 깃든 집들로 인해 비로소 풍요로워진다. 지금의 서울이 절대 잃어서는 안 될 건축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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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포 주공아파트 1단지
강남의 주거지역은 거대한 블록의 총합이다. 청 사진이 된 건 미국의 C.A. 페리가 1920년대에 제안한 근린주구이론이다. 그는 인구 5천~6천 명 단위의 커뮤니티마다 초등학교 1개를 비롯한 일정 수준의 공공 시설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주 장했다. 개포 주공아파트 1단지는 1970년대의 서울에 페리의 아이디어가 이식된 결과 중 하나 다. 당대에 꿈꾸던 이상적 도시상의 흔적이랄 까? 어느 정도의 증축이나 개축은 필요하겠지 만 이 건축의 큰 틀은 도시의 기억을 품고 있는 박물관처럼 큰 변화 없이 보존되었으면 한다.
-오영욱(건축가, oddaa 대표)

김중업 가회동 주택
한때 한국미술관으로 쓰인 건축가 김중업의 가 회동 주택을 꼽고 싶다. 하이클래스의 문화로서 현대 건축가의 설계 가운데 언급할 만한 드문 예가 아닐까 한다. 이 집은 부동산으로는 이례적 으로 지난 2011년, 서울옥션 경매에 출품되기도 했다. 한국에서 건축이 예술로서 가치를 인정받 을 수 있는가 하는 화두를 던져준 셈이다.
-백지원(건축가, 얼반테이터 대표)

절두산 천주교 순교 성지
양화대교 북단의 한강변에는 우아하게 강물을 내려다보는 건물이 있다. 거친 절벽 위에 그 일 부가 된 듯 자리한 절두산 천주교 순교 성지다. 1964년에 지어진 이 건물을 설계한 이는 건축 가 이희태(1925~1981)다. ‘머리가 잘린 산’이라 는 섬뜩한 이름을 얻기 전에 절두산은 잠두봉으 로 불렸다고 한다. 풍광이 수려해 시인묵객들이 들러 풍류를 즐기던 언덕이다. 그곳에서 1866 년 병인박해 이후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처형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아파트나 고층 빌딩뿐인 한강변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붙드는 랜드마크가 됐다. 지난한 역사와 가치 있는 디자 인을 모두 담고 있는 건축이다.
-이소진(건축가, 아뜰리에 리옹 서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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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아파트
흔히 ‘동대문 연예인 아파트’라고도 부르는 서울 창신동 동묘역 바로 앞 ‘동대문아파트’는 이젠 찾아보기 힘든 1960년대 아파트 중 하나다. 1960년대는 한국에 ‘아파트’라는 새로운 건축 양식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기다. 유럽의 아파 트를 모델로 새로운 주거문화와 주거복지의 실 험장으로 등장한 1세대 아파트들이 마포아파트 와 한강아파트, 최초의 주상복합건물로 상가 위 에 아파트를 넣은 세운상가 등이다. 당시 이 아 파트들은 사회 유명인들이 대거 입주해 더욱 화 제였다. 동대문아파트도 연예인들이 입주해 `연 예인아파트’로 불리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는 낡을 대로 낡아 기묘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이 아파트는 1960년대의 꿈과 흔적을 보 여주는 몇 안 되는 생활문화사적 건축 유산이 다. 살아 있는 화석처럼 시간이 정지해 있어 영 화 [세븐 데이즈] 등 여러 영화에 등장하기도 했다. 건물의 구조는 한 동짜리로, 가운데를 비 우고 가장자리에 ㅁ자 형식으로 집들을 배치했 다. 가운데 빈 공간으로는 빨랫줄이 오가는데, 유럽의 공동주택들처럼 도르레를 달아 줄을 끼 우고 잡아당겨서 빨래를 넌다.

이런 풍경은 한 국에선 이 아파트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장 면이다. 1960년대에 지었으므로 연탄 난방이었 고, 지금도 아궁이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우리는 늘 도시 내에서 기억이 담긴 공간을 헐 고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건물을 짓기에 바빴 다. 새로 짓는 건물들 역시 오래오래 이어가기 보다는 20년만 지나면 다시 지을 것으로 예상 하고 짓기 일쑤다. 그런 풍토에서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동대문아파트는 나름의 가치와 의 미가 있다. 간신히 생존해온 이 아파트가 존속 할 수 있을지는 재건축 여부에 달려 있다. 계속 주거용으로 쓸 수 있으므로 가급적이면 주거공 간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 한다. 다른 용도로 쓰이게 되더라도 최소한 아 파트 내 여러 가구 중에 일부를 공공에서 구입 해 1960년대 공동주택의 모습을 모여주는 생 활문화 체험 공간으로 쓰이게 된다면 좋겠다.
-구본준([한겨레] 기자, [마음을 품은 집]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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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의동 보안여관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을 끼고 청와대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좀 이상한 여관에 다다른다. 버 젓이 보안여관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음에도 더 는 숙박을 할 수 없는 이상한 여관이다. 대신 문 화예술이 이곳에서 장기 투숙하고 있다. 통의동 2-1 번지 보안여관은 1930년대에 문을 열어 2004년 문을 닫을 때까지 80여 년의 세월 동 안 ‘여관’이라는 이름 그대로 길손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왔다. 1930년대에는 서정주 시인이 하숙 하며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을 탄생시킨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신식 모텔과 호 텔의 등장 속에서 이 적산가옥의 허름한 여관은 설 자리가 없어졌고, 결국 2006년 9월경 재건 축 결정이 내려지기에 이른다. 보안여관의 진가 를 알아본 건 한국, 일본, 독일 등 다양한 국적 을 지닌 작가들이었다. 이 공간의 안타까운 퇴 장을 염려한 아티스트들이 그해 ‘통의동 골목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8개월간 보안여관에서 기거하며 작업과 전시를 진행 했다. 보안여관의 역사성을 복구하고 살리는 것이 문화 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다고 여긴 까닭이다. 이 ‘사 건’ 이후 보안여관은 재건축 에 들어가는 대신, 문화예술 프로젝트 그룹 메타로그가 인수해 2010년부터 복합 문 화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 옛날 여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은경([월간 디자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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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
내 사무실은 가로수길 근처에 있다. 말 그대로 가로수 때문에 유명해진 길인데 주기적으로 나 무 가지를 친다. 건물주와 업주들이 가로수가 간판을 가리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기 때문이 다. 실제 2008년 11월에 찍힌 다음 로드뷰와 2 년 후인 2010년 10월 이후에 찍힌 사진을 비교 해보면 이 지역의 분위기는 매우 다르다. 업주 들의 불만을 접수한 강남구는 지난 2010년 6월 21일, 가로수 가지 정비에 나선 바 있다. 심지어 최근 들어선 대형 편집매장은 그 앞에 있던 나 무 한 그루를 없애기도 했다. 여섯 살 때, 아버지 는 어린 나에게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하나만 골 라 시청하라고 하셨다. 고심 끝에 내가 내린 답 은 ‘선전(광고)’이었다. 없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건물을 꼽아달라 한다. 고심 끝에 ‘가로수(가지)’ 라는 답을 내렸다. 가뜩이나 보행자에게 불친절 한 서울에서 가로수는 건물 못지않게 아름답고 쾌적한 도시의 경험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어찌 보면 건물 한두 개보다 큰 역할을 할 수도 있는데, 우리가 너무 함부로 대하고 있진 않은 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수인(건축가, 삶것Lifethings 대표)

 


에디터 정준화
포토그래퍼 SEO 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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