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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례_20180112

이인우의 서울 백년가게
70여년 여관의 진화…복합문화예술 공간으로 재탄생

1936년 서정주가 함형수 등과
장기 투숙하며

동인지 <시인부락>을 펴낸 곳

이상, 이중섭, 구본웅 등 화가들의

일탈과 예술혼이 영근 곳

폐업한 여관, 최성우가 2007년 인수

새집 지으려다 역사적 가치 확인

“보안여관 허무는 건 죄악”이라 판단

갤러리·서점·술집에 게스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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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2층 건물이 1936년 서정주·함형수 등이 시동인지 을 펴낸 통의동 보안여관. 지금은 갤러리로 쓰인다. 구름다리로 연결된 왼쪽 4층 건물이 복합문화예술공간 ‘보안1942’이다. 보안여관의 문화사적 후광을 받으며 다양한 문화 생산 공간으로 사용할 것을 목표로 건축됐다.
다윈의 진화론을 빌리면, 문화도 자연처럼 선택을 통해 진화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자연생태계와 달리 문화생태계는 인간이 선택의 주체다. 문화는 인위적인 선택을 통해 모종의 변화를 일으킨다. 어떤 선택은 소멸을 통해 재탄생을 예비하고, 어떤 선택은 보존을 통해 재창조된다. 도시를 보면, 개발과 재생의 전략이 소멸과 생성의 방향을 좌우한다. 어느 쪽의 선택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결과가 그 도시의 일상과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화 선택은 결국 인간이 자기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행위인 것이다.

지난 10년 새 이 문화 선택의 한 사례가 서울 종로구 서촌에서 일어났다. 낡아서 헐릴 운명이던 건물이 현대미술 갤러리가 되고, 그 건물 옆에 원래 건물을 똑 닮은 ‘신관’이 들어섰다. 두 건물은 구름다리로 연결돼 하나의 공간을 이루면서 자신들이 같은 탯줄로 연결돼 있음을 내비친다. 최근 서울의 새로운 복합문화예술 공간으로 등장한 ‘통의동 보안여관’과 ‘보안1942’(종로구 효자로 33)이다.

#경복궁 서쪽 담장을 끼고 청와대 쪽으로 걸어가면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이 나오고, 그 건너편에 구식의 2층짜리 타일 외장(실제로는 벽돌) 건물이 보인다. 옛 ‘보안여관’이다. ‘손님의 안전을 지켜드린다’는 뜻의 보안(保安)여관은 1936년 이전 어느 때에 일본인이 문을 연 것으로 추정된다. 2004년 폐업할 때까지 70년 가까이 청와대와 경복궁 주변의 거의 유일한 여관으로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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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1942’ 최성우 대표가 4층 게스트하우스(보안스테이)에서 경복궁 영추문을 가리키고 있다.
보안여관 건물은 폐업 후 철거될 운명이었으나, 2007년 보안여관을 산 현재의 주인 최성우(58)씨에게 재생의 선택을 받아 2010년부터 갤러리로 쓰인다. ‘보안여관 갤러리’는 폐업 당시의 오래된 여관 내부를 그대로 전시 공간으로 쓴다. 관행적인 전시 구조에 맞춰 억지로 개조하기보다는 건물이 지닌 역사성을 최대한 “살아 있는 그대로” 활용하고 지키기 위한 주인의 “철학 있는” 선택이었다. 갤러리 보안여관의 가장 최근 전시는 지난달 29일 끝난 ‘민주주의자 고 김근태 6주기 추모전-따뜻한 밥상’이었다.

이 보안여관 옆에 지난해 6월 ‘보안1942’라 명명된 새 건물 하나가 들어섰다. 얼핏 보면 독립된 건물 같지만 길 건너에서 바라보면 이 지상 4층(지하 3층) 건물이 옆의 2층짜리 보안여관의 확장판임을 간파할 수 있다. 몸집 작은 보안여관을 위압하지 않도록 위치도 3m 정도 뒤로 물러서 있다.

이 새 건물의 이름이 ‘보안1942’인 것은 보안여관 천장을 수리하면서 발견한 ‘상량식 소화 17년’이란 명문에 근거한다. 이 명문을 통해 보안여관 건물이 서기 1942년에 일본식 목조가옥으로 (재)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소화 17년의 보안여관이 20세기의 유산이라면, 보안1942는 보안여관의 21세기 버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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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 17년(1942년)이라는 건축 연대가 발견된 보안여관 천장의 상량문.
보안1942는 복합문화예술 공간(설계 민현식)으로 지었다. 갤러리(지하 1층)를 비롯해 서점(보안책방) 겸 주점(심야오뎅), 화원(보안화원, 이상 지하 2층), 브랜드 상품점이자 한권서점(2층) 등이 있고, 1층에는 카페 밥집(일상다반사)이 입주해 있다. 지하 3층에는 목공방이 들어설 예정이다. 경복궁과 청와대, 북악산이 바라뵈는 3, 4층의 게스트하우스(보안스테이)가 보안여관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다. 보안1942는 “보안여관이란 문화적 토대 위에서 바라보고(See), 거주하고(Sleep), 먹고(Eat), 읽고(Read), 걷기(Walk)를 제안하는 문화예술 공간이자 글로벌 네트워크를 엮어가는 문화예술 플랫폼”을 자임한다. 이런 모토는 전통적인 숙박업소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시대에 적합하게 계승하고 확장하려 하는지 그 일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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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입구 예술품이 되어버린 보안여관 간판과 카운터가 추억의 이야기를 머금고 있다. 펜·수채화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보안여관은 운이 좋았다. 새 주인 최성우는 안목과 재력과 경영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부산의 유력한 사업가 집안 출신으로 일찍이 프랑스 문화부의 제3세계 연수단 일원으로 선진국의 문화예술 경영을 공부했다. “예술판의 끼리끼리 문화를 타파하고, 사회와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나라와 민족의 차이도 뛰어넘는” 문화예술의 독립지대를 ‘건설’하는 것이 그의 오랜 꿈이었다.

수년간 최적의 장소를 물색한 끝에 2007년 폐업 상태의 보안여관과 주변 가옥 2채를 사들인다. 그 자리에 자신의 이상을 구현해줄 새집을 지을 계획은, 비가 새는 낡은 지붕을 보수하게 되면서 ‘차질’을 빚게 된다. 어려서부터 규모가 큰 적산가옥(부산 동구 초량동의 일명 ‘다나카 가옥’)에서 생활해본 그에게는 1942년이란 확실한 연대를 지닌 근대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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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여관은 2004년 폐업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 재활용되고 있다. 원칙 없는 보수로 원형을 훼손하기보다는 본래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해보자는 뜻이다.
70년이 넘는 건물의 수명에 주목한 최성우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보안여관의 역사에도 근접하게 된다. 알고보니 보안여관은 근대 한국 예술의 산실 중 하나였다. 1936년 서정주가 함형수 등과 장기 투숙하며 김달진, 김동리, 오장환 등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펴낸 곳이 바로 보안여관이었다. 이상, 이중섭, 구본웅 같은 문인·화가들의 일탈과 예술혼이 영근 곳도 보안여관 13개 방이었다.

보통사람들의 역사도 만만치 않았다. 통행금지가 있던 권위주의 시대에는 청와대와 옛 공보처 공무원, 박물관(철거된 경복궁 안 조선총독부 건물이 국립중앙박물관이었다) 학예사들이 숙박계를 남겼고, 청와대 경비 병사들의 면회 가족과 연인들의 추억도 쌓였다. 선배 문인들의 기운을 이어받고 싶은 신춘문예 지망생들이 열정을 벼리던 곳이기도 했다. 보안여관은 명사들이 등장한 역사 속의 ‘방’이기에 앞서, 무수한 익명들이 삶의 잔영을 남기고 간 민중들의 방이었던 것이다.

“적산가옥에 친숙했던 개인적 경험으로, 선진 문화경영의 이상으로, 무엇보다 보안여관의 역사로 보나, 그 어떤 이유로도 이 건물을 허무는 것은 죄악이었다.”

최성우의 생각은 이때부터 박제화된 유물로서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문화의 일부로서 보안여관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환됐다. “최성우에 의해 보안여관이 발견된 것이 아니라, 최성우가 보안여관에 사로잡혔다”는 그의 말에는 아이러니한 행복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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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스트하우스의 방들은 특별한 전망을 제공한다. 경복궁 경회루 원경, 위에서 보는 영추문 누각, 북악산과 청와대 지붕 등이 방마다 보인다. 실내의 집기들은 대부분 협업 작가들의 작품이다.
#보안여관의 보존과 활용을 위한 프로젝트인 보안1942가 완공되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 보안여관과 보안1942가 어떻게 콘셉트에 맞게 공존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거듭된 결과였다. 적산가옥이 일제 잔재라는 인식과 문화재 보존에 대한 이해 차이 때문에 무수한 설계 변경과 건축허가를 둘러싼 실랑이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자본력과 집념이 없으면 돌파하기 어려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공간이 열린 다음 단계는 그 공간에 시간을 채우는 일이 남았다. 시공이 갖춰지면 스토리가 호출되고, 구축된 스토리는 공간에 역사를 부여한다. 최성우는 보안프로젝트 계획 수립 10주년이 되는 오는 10월, “집을 지은 뒤 상량문을 올리는 것처럼” 지난 10년의 건축 과정을 정리한 백서를 출간할 예정이다. 가칭 <보안백서>는 지난 80여 년에 걸친 보안여관의 과거와 현재,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이야기 등을 두루 담을 계획이다. 건물 자체의 이야기뿐 아니라 건물이 생기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땅과 사람의 역사도 아울러서 보안여관의 전사(前史)로 삼는다는 ‘야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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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주변 환경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태될 운명에 처했던 한 일본식 목조가옥이 새로운 형태의 문화예술공간 겸 ‘문화숙박업소’로 재창조된 대강의 사연이 여기까지라면,

앞으로 보안의 꿈은?

“대학 시절부터 무경계의 공간에서 먹고 자고 놀며 일하는 문화예술의 플랫폼을 꿈꿔왔다. 이제 그 기본 토대는 마련됐으니, 깃발을 지키는 거다. 문화 ‘독립공화국’의 깃발. 자본의 욕망 구조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스스로 문화를 사고하고 성찰하고 생산하는 문화예술의 건강한 생태계로 이름 불리길 바란다.”

자립 경영의 비전은?

“어떤 독립공화국도 자립할 수 없으면 환상에 불과하다. 지금부터 우리 프로젝트는 자가발전, 자체 생존이다. 비영리 행위인 문화예술 경영에 100% 순수한 자립이란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자기 전시기획 정도는 자체 해결이 가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지난 반년의 경영 성과를 결산하면?

“생각보다 빠르게 손익분기점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갖게 됐다. 파트너십으로 운영한 주점과 카페의 실적이 좋다. 술집은 주말 저녁이면 예약이 어려울 정도이고, 1층 밥집 카페는 이 일대 최고의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갈 길은 멀지만, ‘우리 콘셉트를 유지하면서 돈도 번다’는 목표대로 간다.”

10년 뒤 보안의 모습을 설정한다면?

“그때도 지금처럼 ‘살아 있음’이 지상과제다. 그다음은 보안여관을 잘 건사하는 것이다. 보안여관이 백 살이 되어서도 끄떡없는 건물이었으면 좋겠다. 세 번째는 좋은 큐레이터, 유능한 문화경영자들이 보안프로젝트를 통해 발굴되고 성장해서 나를 디렉터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주는 것이다. 노후 목표가 국제적인 떠돌이로 사는 것이다.”

글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원본 링크 : http://www.seouland.com/arti/society/society_general/298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