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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_11.03.28

[여의춘추-손수호] ‘보안여관’을 아십니까?

햇살 눈부신 주말 오후, 서울 서촌의 한 폐옥으로 문화인들이 모여들었다. 집결지는 통의동 2-1 보안여관. 프리모 레비의 시집 ‘살아남은 자의 아픔’(노마드북스) 출간을 기념하는 북 퍼포먼스가 열렸다. 기타와 피리, 리코더가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시를 낭독하고 춤을 추면서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의 삶을 반추했다. 시인 이문재, 소설가 김애란 등이 낭송에 참여하고 정영두가 무용을 맡았다.시집을 편역한 이산하 시인은 24세에 나치에 납치됐다가 1987년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탈리아 작가의 처절하고도 치열한 일대기를 추억했다. 그는 북 퍼포먼스를 “레비에게 24년 만에 바치는 진혼제”라고 말하면서 “내 안의 나치를 만나는 시간으로 삼자”라고 나지막이 호소했다. 행사는 지붕과 기둥, 벽체만 남은 폐허와 같은 곳에 이루어져 효과가 배가됐다.

근대시인들 체취 담긴 廢屋

이제 프리모 레비의 이름을 떼놓고 ‘통의동 보안여관’을 들여다볼 시간. 여관이 자리한 경복궁 서쪽 ‘통의동’은 예로부터 예술가들이 살던 곳이다.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겸재 정선이 벗들과 노닐었고, 추사 김정희가 여기서 문예를 닦았다. 이상의 ‘오감도’에 나오는 ‘막다른 골목’도 이쯤이다. 지금은 인사동에서 건너온 화랑과 대안공간, 출판사, 건축사무소가 하나둘 둥지를 틀어 새로운 예술촌을 형성하는 중이다.

‘보안여관’ 이름에서도 의외의 정감을 느낄 수 있다. 작명의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여관은 본시 사람들이 머물고 떠나는 곳이니, ‘편안을 지킨다’는 뜻은 숙박업의 옥호로 안성맞춤 아닌가. 국가보안법이 1948년에 제정됐고 여관의 건립연도가 1930년대이니 단어의 순수성에 대한 알리바이가 확실하다.

핵심은 문학과 미술의 흔적이다. 시인 서정주는 1930년대에 이곳에 머물면서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었다.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시인, 화가 이중섭이 뻔질나게 드나들어 여관의 문지방을 닳게 했다. 문학사의 중요한 장면이 이곳에서 탄생하고 연출된 것이다.

보안여관은 2004년에 문을 닫았다. 얼추 80년간 서촌에서 나그네들을 맞다가 장소와 시설 여러 면에서 여관의 기능을 다해 자연사한 것이다. 최초 인수자는 지하를 파서 공연장을 꾸미고 싶어 했으나 청와대 주변의 집회시설은 허가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메타로그 대표 최성우에게 넘겼다.

최성우는 프랑스에서 문화예술경영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그는 꽃무늬 벽지가 뜯겨지고 서까래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이곳을 부동산 혹은 물리적 구조물로 보지 않았다. 옛 건물을 밀어버리고 새 건물을 지어 가게나 들이면 좋으련만 이 곳의 역사성과 문화성이 소중했다. 그는 고심 끝에 보안여관을 ‘예술이 쉬어가는 문화숙박업소’로 명명하고 전시장으로 개방하고 있다.

지금도 보안여관 내부에는 옛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숙박요금은 8000원에 멈췄다. 현관에는 거울이 걸려 있고, 그 거울에는 ‘일상의 다섯 가지 고마움’이라는 옛글이 쓰여 있다. “고맙습니다-감사의마음, 미안합니다-반성의 마음, 덕분입니다-겸허의 마음, 제가 하겠습니다-봉사의 마음, 네 그렇습니다-유순한 마음.”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삐걱거리고 방구석마다 거미줄이 걸려 있다.

새로운 한국문화 발신지 되길

앞으로 보안여관은 어떻게 될까. 폐허로 남을까, 리모델링을 할까. 최성우는 신중하게 인문적으로 접근한다. 이곳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과 기록을 모아 ‘보안백서’를 발간하고 문화재생공간 혹은 새로운 문화의 발신지로 삼겠다는 생각이다. 건물에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만 해놓고서는 오래된 미래를 지향하며 먼 길을 천천히 걷고 있다.

서울은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부수고 없앴다. 지금 서촌에서도 옛것을 헐고 새것을 짓는 일이 한창이다. 보안여관은 한국문학의 역사스페셜이다. 날이 좀 따뜻해지면 통의동을 찾아 보자.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