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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GUE_2013.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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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다방, 여관, 당구장 등 버려진 근·현대 건축물들의 폼 나는 인생 2막. 먼지 투성이 과거를 벗고 예술의 옷을 입은 갤러리는 신데렐라가 된 재투성이 아가씨처럼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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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우물과 무성한 잡초만이 주인 없는 땅을 지켰던 옛 국군기무사령부는 오는 6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UUL) 완공을 앞두고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벌거벗은 모나리자가 그려진 공사 가림막으로 새로운 파격을 예고했던 공사장 초입엔 지난 1월부터 휴머노이드 로봇 데스피안을 안내원으로 내세운 홍보관이 운영 중이다. 일제시대 병원으로 문을 연 뒤, 1971년 보안사령부가 들어오며 오랜 세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됐던 파란만장한 근대 건축물의 화려한 인생 2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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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스 강 인근의 버려진 화력발전소를 개조한 테이트모던이 굴뚝을 상징처럼 남겨두었다면, 건축가 민현준이 설계한 서울관은 초기 모더니즘 양식을 보여주는 근대 건축물이자 한국 현대정치사의 주요 무대가 된 기무사 본관 건물(등록문화재 375호)을 남겨두었다. 서도호의 ‘집 속의 집’이 설치될 예정인 19m 높이의 ‘인포박스’를 거치면 4개의 마당이 있는 아담한 전시실(지하 3층, 지상 3층)들을 둘러볼 수 있는 구조다. 조선시대 종친부 건물인 경근당과 옥첩당도 복원돼 미술관의 일부가 될 예정이다. 제분 공장을 현대식 미술관으로 바꾼 발틱 현대미술관, 30년 넘게 버려져 있던 베니스 관세청 건물을 개조한 안도 타다오의 푼타 델라 도가나 등 먼지 투성이 과거를 벗고 예술의 옷을 입은 갤러리는 신데렐라가 된 재투성이 아가씨처럼 그 자체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다.

한남동의 한적한 주택가 골목길에 올해 초 문을 연 대림미술관의 프로젝트 스페이스 ‘구슬모아 당구장’은 재개발과 함께 사라질 뻔했던 진짜 당구장을 독특한 분위기의 전시 공간으로 만든 곳이다. 전시를 구경하다 당구도 한 게임 칠 수 있게 당구대까지 그대로 남겨두었다. 출출하면 냉장고의 음료를 꺼내 먹거나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먹을 수도 있다. 4월 13일부터는 네 번째 전시, 시각예술가 정소영의 [움직이지 않고 여행하기]전이 열린다. 서울중앙선 양수역에는 대안공간 ‘갤러리 소머리국밥’이 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부근 허허벌판의 빨간 지붕집이 바로 갤러리다. 실제로 5년간 소머리국밥 식당이었던 곳을 노란 간판까지 그대로 남겨 갤러리로 용도 변경했다. 70년대 선탄장의 흔적이 남은 철암역을 갤러리로 만든 바 있는 비정형 비법인 단체‘할아텍(할 예술과 기술)’ 작가들이 주축이 돼 정기적으로 전시가 열린다. 경성을 주름잡던 모던 보이와 가난한 예술가들이 장기투숙했던 통의동 ‘보안여관’의 변신은 유명하다.메타로그 아트서비스의 최성우는 80년 묵은 먼지가 풀썩이는 여관을 옥호는 물론, 먼지 하나까지 고스란히 인수해 갤러리로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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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한 공장지대 역시 예술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놀이터다. 예술 공장으로 거듭난 문래동 철공단지엔 하루가 다르게 재미있는 공간들이 생겨난다. 과거 주물공장이 었던 곳을 미디어 작가들의 창작 공간이자 전시 공간으로 삼은 ‘대안예술공간 이포’,10년 동안 방치됐던 폐허 같은 건물의 벽을 뚫어 전시를 비롯한 각종 예술 행사를 벌이는 ‘LAB39’, 문턱 낮은 문화 예술 공간을 지향하는 ‘정다방 프로젝트’ 등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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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상가 건물 지하에서 20여 년간 철공인들에게 커피를 배달하던 ‘정다방’ 간판과 이름을 살려 작가들의 회동 장소와 전시 공간으로 활용해오던 ‘정다방 프로젝트’는 최근 갤러리 인근에 같은 이름의 브런치 카페까지 만들었다. 달걀 노른자를 띄운 모닝 커피나 쌍화차는 없지만, 직접 만든 대추차 정도는 맛볼 수 있다. 황학동 만물시장에 신기루처럼 자리한 ‘솔로몬 아티스트 레지던시&갤러리’는 어느새 2기 입주 작가 모집까지 끝냈다. 6층짜리 낡은 ‘솔로몬 빌딩’의 한 자리를 차지하던 앰프와 카세트 수리점, 노래방 반주기 음향센터 등은 2년 전부터 젊은 작가들의 창작 스튜디오로 운영되고 있다. 성인용품점과 이웃한 1층의 ‘케이크 갤러리’는 셔터로 문을 여닫는 식이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도 나섰다. 개항기 때 지어진 대한통운 창고를 예술 창작실로 만든 ‘인천 아트 플랫폼’이 좋은 반응을 얻고, 고속철도의 개통과 함께 기능을 잃고 방치 되었던 구 서울역사가 ‘문화역284’라는 문화예술의 시종착역으로 운행을 재개하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3월 8일 정식 개관한 ‘대구예술발전소’는 1996년 KT&G가 대구시에 기증한 연초제조 공장이었다. 기계 공구상이 집결된 수창동에 위치한다는 점 외엔 특별히 과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쉽지만, 또 다른 청주 연초제 조창의 변신이 기다리고 있다.

2004년 문을 닫기 전까지 66년 동안 연간 100억 개비의 담배를 만들어내던 이 국내 최초의 담배 공장은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수장고 겸전시 공간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지난해 여름, 특별 열차를 타고 몰려든 인디밴드들과 100여 명의 젊은 예술가들로 들썩였던 장항은 ‘선셋 장항 페스티벌’이 끝난 후, 구 장 항역사를 문화관광공원으로 조성하고, 미곡 창고를 미디어아트센터로 개조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80년대 말 제련소가 폐쇄된 후 급속히 쇠락한 항구 도시는 이제 상공업 대신 문화를 통해 생기를 되찾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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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사연 많은 공간들의 인생 역전이 늘 성공으로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수원의 옛 안마시술소에 둥지를 틀었던 ‘인계시장 프로젝트’나 낡은 목욕탕을 전시실로 고친 대안 공간 ‘반디’ 등은 참신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경영난과 재개발 등의 이유로 인해 문을 닫아야 했다. 하지만 이 색다른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도시의 풍경을 바꾸고 예술을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 변신의 이유가 근대 문화유산의 보존이든, 도시 재생을 위한 커뮤니티 아트든, 예술가의 주머니 사정 때문이든 간에 말이다. 평범하다 못해 초라했던 공간들의 폼 나는 제2의 인생! 새 출발하는 그들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길 바란다.

에디터 이미혜
포토그래퍼 SEO SONG YI, CHA HYE KYUNG

발행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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