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말, 그들이 왕이었을 때

A-NI-MAL, When They were kings

  • 일시 : 2023.10.20 – 11.12
  • 장소 : 아트스페이스 보안 1,2,3
  • 참여작가 : 고등어, 기슬기, 백현주, 전명은, 미르시어 캉토, 살라 티카 + 김복희, 최대진
  • 운영시간 : 12:00 – 18:00
  • 월요일 휴관
  • 입장료 무료
  • 기획 : 강영희
  • 코디네이터 : 문하영
  • 그래픽 디자인 : 아페퍼
  • 공간 디자인 및 조성 : 무진동사
  •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Date: 2023.10.20 – 11.12
  • Venue: Artspace Boan 1,2,3
  • Artists:  Mackerel Safranski, Seulki Ki,  Heaven Baek,  Eun Chun, Mircea Cantor,   Salla Tykkä + Bokhui Kim,  Daejin Choi
  • Hours: Tue -Sun  12:00 – 18:00
  • Closed on Mondays
  • Free Admission
  • Curator. Younghee Kang
  • Coordinator. Hayoung Moon
  • Graphic Design. Apepper
  • Space Installation. Mujindongsa
  • Support. Arts Council Korea

아니말, 그들이 왕이었을 때

1.

동물원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평일 오전의 동물원은 한산했지. 인간은 고사하고 동물조차 눈에 띄지 않았어. 휑한 동물원은 말라빠진 뼈대를 드러낸 채 몸을 웅크린, 그 자체로 거대한 짐승 같기도 했다. 언제 몸을 일으켜 너를 놀라게 할지 몰라, 하지만 사실 그는 너에게 관심이 없다. 다만 네 집요한 시선으로부터 방해 받지 않을 수 있다면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그런 둔갑술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는 유리문을 밀고 유인원관으로 들어간다. 안에는 동물 모형과 진짜 식물이 뒤섞인 흉물스런 구조물이 있고, 그 구조물을 중심으로 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칸막이형 우리가 둥글게 늘어서 있다. 각각 세네 평 정도 되었을까. 앞쪽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통유리였고 안쪽에는 2미터 정도 높이의 턱과 바깥을 향한 유리창이 하나 있다. 

각 칸마다 거대한 유인원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우리에게 등을 돌렸으며, 대체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곳은 생명의 자잘한 움직임이 소거된 무음의 방. 나는 하나의 우리에서 하나의 우리로 천천히 이동한다. 그러다 높은 턱에 앉아 있는 유인원을 발견하고 아이처럼 순진한 척 유리에 두 손바닥을 붙이며 얼굴을 바싹 갖다 댔지. 그렇게 우리는 시선을 교환한다 (그것을 교환이라고 할 수 있나, 시선의 반사, 흡수).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발견한 유인원은 느릿하게 자신의 몸을 허공에 띄우더니 내 얼굴을 향해 둔중한 몸을 힘껏 내던진다.

눈 앞에서 갈색의 털들이 파도처럼 흐드러진다. 나는 진동으로 강하게 떨리는 유리에서 얼굴을 떼어낸다. 나를 지켜주는 안전한 유리, 고마운 유리. 그런데 유인원은 멈출 생각이 없지. 그는 고집스럽게 다시 턱 위로 기어올라가고 나를 향해 온 몸을 던지는 거야. 

그제서야 그들의 무수한 발톱 자국에 긁혀 희미해진 유리가 보인다. 투명함이 버텨내는 무게가 얼마나 끔찍한지. 그와 나 사이를 분리하는 이 유리가 깨져 버린다면 우리의 몸이 하나로 엉키고, 내가 느낄 이 고통이 그의 고통인지 나의 고통인지 분간이 가지 않겠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유인원의 고독한 행위만이 둔탁한 소리가 되어 내가 그곳을 벗어날 때까지 반복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2.

동물이라는 명사를 다시 사유한다. 사물과 인간의 사이에서 동물(動物)은 움직임이라는 동사를 자신의 물성 앞에 내세우고, 라틴어에서 유래한 애니멀(Animal)은 영혼, 공기를 뜻하는 anima를 자신의 어원으로 품고 있으며, 알파벳 ‘ANIMAL’을 음절 단위로 해체하면 불어로 악, 악행, 고통 등을 뜻하는 ‘MAL’이라는 단어가 마지막에 나타난다. 

입을 벌려 소리 없이 ‘아’와 ‘니’를 발음하고 드디어 ‘말’에 이르르면, 나는 우리가 동물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어떠한 ‘MAL’이 존재하며, 동물을 온전히 바라보고 호명하는 데 실패했음을 직감한다. 인간에게 동물은 타자이며 패자이고, 이제 동물은 (그 자신도 동물인) 인간에게 있어 때로는 인간보다 사물에 가깝다. 하지만 동물 입장에서 세계를 인식한다면 그 기본 도식은 어떻게 될까? 동물의 오른쪽에 ‘신’이 그 왼쪽에는 ‘인간’이 오지 않을까? 신과 동물은 앞을 향해서만 나아가는 직선적인 시간을 모른다는 뤽 다르덴의 말처럼 동물은 늘 현재를 살며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감각한다. 

바벨탑 이후 동물과 이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슐러 K. 르귄의 짧은 소설이 있다. 야크, 해달, 쥐와 벼룩, 노새, 닭, 고양이, 앵무새, 곤충과 물살이, 그리고 다른 모든 동물들은 아담이 그들에게 부여한 이름을 명명자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그 이름이 더는 필요치 않았고, 이름 없음을 그들의 본질처럼 받아들였다.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거부한 그녀 역시 자신만의 ‘느리고 slow, 새롭고 new, 실험적인tentative’ 언어를 찾아나선다는 짧은 이야기다.

동물이라는 것, ‘동물이라 불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 전시는 동물이라 불리는 것과 그 경계, 그 경계를 긋고 나서 보이는 우리의 공통의 것과 경계의 분열, 그 안에서 생겨나는 어긋난 시선과 충돌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관계에 대한 상상을 그러모으고자 한 무모한 시도다.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언어로 서로를 부르고, 새로운 풍경을 그려낼 수 있는지 그 가능성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