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채 개인전
히치콕에서 따온 장면과 방해 형상

  • 일시: 2023. 8.1 (화) – 8.20 (일)
  • 장소: 아트스페이스 보안 2
  • 운영시간: 12:00 – 18:00
  • 매주 월요일 휴관
  • 입장료 무료

Minchae Kim Solo Exhibition
A Scene from Hitchcock and Intervening Images

  • Date : 01. Aug. 2023 – 20. Aug. 2023
  • Venue : ARTSPACE BOAN 2
  • Hours : 12PM – 6PM
  • Closed on Mondays
  • Free Admission

Credit

  • 글  강수미
  • 번역  전민지
  • 사진  임장활
  • 그래픽디자인  한만오
  • 공간디자인  김연세
  •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 Text  Sumi Kang
  • Translation  Minji Chun
  • Photpgraphy  Janghwal Lim
  • Graphic Design  Mano Han
  • Space Design   Yeonse Kim
  • Supported by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현재의 회화

김민채의 《히치콕에서 따온 장면과 방해 형상》

강수미 (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1. 2023년의 ‘회화적’

젊은 미술가 김민채의 그림들은 회화적이다. 그림=회화라는 맥락에서, 그림이 회화적이라는 말은 뻔한 동어반복 같다. 그런데 회화예술에서 ‘회화적’이라는 말뜻은 의외로 단순명쾌하지 않다. 그림이 시대, 사회, 문화, 예술 양식(style)에 따라 변화해온 만큼이나 ‘회화적’이라는 말에 포함되는 미학적 형식과 내용 또한 변화해왔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의 과도기적 대가 엘 그레코(El Greco)가 그린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The Burial of the Count of Orgaz)>(1586)을 보라. 화가는 등장인물들의 얼굴과 신체를 길게 늘려 왜곡하고, 회색 톤의 거대한 화면에 결정적인 부분만 찬란한 금색을 칠해서 예수의 승천과 지상의 장례식을 우아하고 강렬하게 대비시켰다. 그 데생과 색채대비법이 곧 엘 그레코의 회화적 성취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기법만이 그림을 회화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김민채의 2023년 신작들인《히치콕에서 따온 장면과 방해 형상》시리즈에서 보겠지만, 오늘 여기서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은 미술아카데미즘으로 훈련된 감각은 물론 현재의 문화적 취향 및 비주얼 스타일과 호응하는 자신만의 회화적 특질을 구축하려 한다.

    영국 테이트미술관 공식 웹사이트에는 “미술과 미술가(Art and Artists)” 카테고리가 있고, 그 하위로 “미술 용어(Art Terms)” 챕터가 있다. 미술 분야의 주요 유파, 예술가 그룹, 예술이념, 양식, 미학 개념, 표현 기법을 마치 사전처럼 알파벳순으로 정렬하고 각 항목 별로 핵심 내용을 설명한다. 그 중 P에는 형용사 ‘painterly’가 유일한 항목인데, 다음과 같이 정의돼 있다. “회화적(painterly)은 ‘느슨하거나’ 강하게 통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서, 완성된 그림의 표면에 붓 자국이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1) 이 설명이 옳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사실 ‘회화적’이라는 말은 테이트의 단선적 정의보다 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문제적 표현이다. 그 용어는 미술과 관련 있다면 누구나 한 번 이상은 그림/이미지 앞에서 입 밖에 낸 상투어다. 긍정적인 의미로든 비판적인 의미로든, 또 창작의 당사자(미대 입시생, 미대생, 미술가…)든 아니든(같은 전공자, 큐레이터, 미술 애호가, 컬렉터, 교수, 미술비평가…) 상관없이 말이다. 그럼에도 미술계와 일반 미술 애호가들에게는 테이트가 정의하는 뜻처럼 화면의 붓질이 거칠고 묘사가 느슨한데도 ‘멋지다(cool)’는 의미로 회화적이라는 말이 통용돼왔다. 또 캔버스에 물감이 마구 튀고 형상과 배경이 얽히고설켜 어지러운데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화가의 주관성과 천재성의 발현인 양 여겨졌다. 말하자면 ‘회화적’이라는 말은 ‘반(反)일러스트적이고 비정형적’이어서 회화예술만의 자유를 표현하는 태도로 통용돼온 것이다.

   하지만 2023년 현재, 기존 맥락에서 회화적인 것과는 다른 스타일의 회화적인 그림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마네나 고흐 같은 화가들의 비(非)삽화적인 붓질이 아니다. 폴록이나 드쿠닝의 그림처럼 추상적 표현으로 격렬해진 화면도 아니다. 그렇다고 미니멀리즘의 텅 빈 캔버스, 팝아트의 매끈한 디자인이나 기술 복제된 이미지도 아니다. 나는 2007년 첫 스마트폰이 출시되고 SNS가 우리 일상의 매트릭스가 된 과정, ChatGPT 등 생성형 AI가 학문과 예술의 근본 축을 흔들고 있는 최근의 상황 속에서 과거와는 다른 ‘회화적 회화’가 출현했다고 확신한다. 특히 지금 여기서 회화를 하는 20~30대 젊은 작가들에게는 ‘회화’라는 장르 자체가 복합적 문화현상에 대한 시각적 반응이자 생성(creative) 작업이 되었다. 요컨대 ‘이미지’(시각적 현상에 한정되지 않고 오감은 물론 주체의 정신과 주관성을 포함한 형상)에서 ‘비주얼’(시각을 통한 지각, 빛 · 칼라 · 모션 같은 시각 현상)로의 이행이 핵심이다. 그러한 그림들을 ‘현재의 회화(Painting of the Present)’라 명명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나타나는 ‘회화적’ 성질은 김민채의 그림들에서 실증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2. 매끈하고 단단하게, 하지만 비주얼에 따라   

   김민채의 그림들은 위와 같은 의미로 ‘현재성의 회화적 회화’다. 이 작가의 회화적인 면모는 2010년대 이후 국내외 미술계에서 활동을 시작한 영 아티스트들의 시각문화 경험과 미적 판단, 이미지 수집과 활용(혹은 발견과 편집), 감성의 발현과 표현 방식에 맞닿아있다. 그만큼 김민채의 작업이 동시대적이고 현재적으로 특정하게 집단화된 회화 경향성을 띤다는 의미다. 그녀가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작품들은 일단 구상회화(figurative painting)로 분류할 수 있다. 화면에 구체적인 형상들과 공간적 배경이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형상과 배경은 특정 인물이나 정물, 어떤 풍경이나 건축물, 특정 사건이나 이야기 같은 범주로는 정확히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하고 분열된 이미지들이다. 또 김민채는 작가 자신의 삶이나 현실 사회에 관한 내용, 혹은 문학이나 영화처럼 내러티브가 있는 장면을 1대 1로 직접 모방하지 않는다. 대신 인터넷이나 소셜 미디어(흔히 인스타그램)에 ‘1980s’ 등의 키워드를 검색하는 중에 직관적으로 눈에 띤 사진(예컨대 출처가 불분명한 스틸)을 작업 리소스로 선택한다. 그리고 그 원재료를 맥락이 없고 이미지들끼리 충돌하도록 파편화 한 후 한 화면으로 편집해서 그린다. 때문에 감상자는 그녀의 작품들에서 작가의 의도나 작업의 큰 주제는 물론 그림에 등장하는 작은 형상들의 정체조차 읽어내기가 어렵다(작가에 따르면 자신의 그리기를 통제하는 근본적인 의도와 의미는 없다. 그런 점에서 작품은 ‘이미지’가 아니라 ‘비주얼’을 대상으로 한다). 김민채가 작가노트에 밝히고 있듯이 “이미지를 경험하고 인식하는 과정에서 오류와 혼란을 일으키는 지점”이 작가에게는 작업의 표적이다. 또한 이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아이러니함과 심리적 불편함”을 정서적 바탕에 깔고 그려진다고 밝혔다. 때문에 김민채는 자신의 그림을 보는 이 또한 그 상태를 체험하기를 바란다.

   김민채의 그림은 구상회화임에도 불구하고 ‘눈속임회화(trompe l’eoil)’처럼 시각적 환영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쿠르베식 리얼리즘처럼 객관적 현실을 재현하지도 않는다. 이번 개인전에 선보이는 《히치콕에서 따온 장면과 방해 형상》 시리즈를 중심으로 보면, 김민채는 오히려 작가가 망막(“맨눈”)으로 보는 눈앞의 사실들 대신 디지털/데이터의 바다를 떠도는 1980년대의 유령적 이미지를 히치콕 영화의 스타일로 그리는 데 목표를 뒀다. 하지만 여기서도 포인트는 김민채가 히치콕의 영화에서 특정 장면을 따와 다시 그림으로 그리거나 변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럼 전시 제목에서 “따온 장면”이라는 말은 거짓 진술이거나 오류인가? 김민채가 히치콕으로부터 자신의 회화로 “따온 장면”은 일 대 일의 이미지 모방과 복제 방식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녀의 방식은 ‘히치콕’이라는 거장의 영화 미학이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으로 현재의 문화경향에 녹아있고, 젊은 세대에게는 과거의 것이지만 낯설게 멋스러운 ‘비주얼’로 느껴지는 양태(mode)를 자기 그림에 슬쩍 풍기는 것이다. 객관적인 인용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참조로써.

   내가 보기에 김민채가 작업하기를 선호하고, 그래서 감상자가 자신의 작품에서 즐기기를 바라는 회화적인 그림 ―동시에 현대미술계(contemporary art scene)의 회화적 경향으로 인정받는― 은 작품이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어떤 이미지’로 느껴지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히치콕이 영화의 장면을 구축하는 방법은 깊이 알지 못하더라도, 인스타그램에 자주 뜨는 비주얼로는 친숙해진 일종의 ‘히치콕st.’를 회화적으로 풀어냈다. 그래서 가령 감상자가 김민채의 그림을 매개로 때로는 불안과 당혹감을 느끼고, 때로는 착각과 혼란에 빠진다면, 그것은 요컨대 ‘좋은 감상’이다. 그러기 위해 김민채는 붓질을 많이 드러내지 않고 최대한 표면을 부드럽게 매만져서 단정한 일러스트레이션 같은 형상과 배경을 만든다. 또 다소 투박하면서 간결성이 있는 선(線)으로 데생을 한다. 갈색이나 회색 같은 중간 색조를 섬세하게 변주하는 방식으로 면(面) 처리를 하는데, 그림 전체로 보면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생경한 색이나 형상을 넣음으로써 앞서 논한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처럼 화면에 대비 효과와 긴장감을 높인다. 그럴 때의 색채나 형상이 《히치콕에서 따온 장면과 방해 형상》제목에 담긴 “방해 형상”의 의미다. 작가는 이를 그림에 의도적으로 설정함으로써 자신의 미술이 감각 지각적 특이성과 심리적 불편함을 갖도록 했다. 구체적으로 “방해 형상”에는 그림 속의 그림처럼, 전체 화면 위에 작은 사각형 프레임을 겹쳐 그리는 구성이 포함된다. 큰 화면 안에 작은 사각형 화면을 겹치듯 그리지만, 그것이 결국 한 캔버스 위에 붓질로 면들을 구분한 것이기 때문에 시각적 환영을 발생시키기보다는 그림 자체가 이질적이고 애매모호하다는 인상을 유발한다. 이렇듯 통일성과 집중성을 깨고 그림이 부분들의 우연한 겹침처럼, 과거에서 따오고 현재에서 방해받는 파편적 비주얼의 집합처럼 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김민채가 동시대 미술계에서 자신의 회화를 형성해 나가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현재의 회화적인 것’은 앞으로의 그림을 통해 또 다른 ‘현재의 회화적인 것’으로 바뀔 것이다.

끝.


1) https://www.tate.org.uk/art/art-terms/p/painter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