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민 개인전 Jand Jaemin solo exhibition
《Muddy Bed》

  • 일시: 2022. 04. 21 – 05. 15
  • 장소: 아트스페이스 보안 2, 3 (신관 B1,2)
  • 운영시간: 12:00 – 18:00
  • 매주 월요일 휴관
  • 입장료 무료
  • Date : 21. Apr. 2022 – 15. May. 2022
  • Venue : ARTSPACE BOAN 2,3 (B1,2)
  • Time : 12PM – 6PM
  • Closing Days : Every Week Monday
  • Admission Free

육체 위를 구름처럼 떠다니는 그것
(제스처와 형상 간의 힘겨루기)

장재민 개인전: Muddy Bed
2022.4.21-5.15
보안1942 (통의동 보안여관)
아트스페이스보안 2,3 (신관 지하1,2층)

안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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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1>(2022) 그림 속 시점은 두 개의 벽과 바닥이 만나는 공간 내부의 모서리를 향한다. 크고 작은 캔버스가 벽을 모두 차지하고, 풀어 놓은 물감은 작업대 위에 가득하다. 앞에 세워 있는 전신 거울이 그림의 시점과 반대쪽 벽에 있는 캔버스와 누군가의 뒷모습을 비춘다. 캔버스와 물감과 거울이 에워싸고 있는 작업실 내부 공간을 그린 <스튜디오 #1>에서, 그는 벽으로 가로 막힌 실내 공간과 그 위에 얹혀 있는 물감의 여러 흔적들을 또 다른 평면에 안착시켰다.
그동안 바깥 풍경 그림을 주로 그려왔던 장재민은 <스튜디오 #1>에서 자신의 작업실 내부 모습을 그리게 된 새로운 정황을 보여준다. 일상의 환경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숲이나 유원지 같은 자연 풍경에 대하여, 그는 진부한 클리셰를 뚫고 신체의 현상적 경험에 따른 회화적 제스처로 접근해 왔다. 이를테면, 첫 개인전 ⟪시간을 잃어버린 풍경⟫(2014,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부터 ⟪부엉이 숲⟫(2020, 학고재)에 이르는 동안, 자신이 체험했던 자연 풍경을 그림의 대상으로 가져와 시각의 신체성에 근거한 회화적 변환의 방법들을 실험했다. 그는 풍경을 그리는데 있어서 직접적인 사생의 과정을 거치거나 기록해온 사진을 하나하나 펼쳐 놓고 하지는 않는다. 체험한 기억에 의존해 주로 목탄을 써서 풍경 밑그림을 그리고 큰 붓질을 통해 색채로 화면을 채운다. 이는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가 “객관적 세계로부터 퇴각”하는 신체의 지각에 대해 말했던, 일종의 “육화된 주관성”을 종종 환기시킨다. 지난 개인전 ⟪부엉이 숲⟫의 서문에서, “작가가 자연을 가로질러가며 관계를 맺는 과정은 시각적 풍경에서 다양한 지각적 경험을 얻는 시간”이며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그것의 기억을 되찾는 시간”이라고 비평가 정현이 서술한 대목은 그것을 말해준다.
그보다 앞서, 나는 오래 전에 어떤 전시 서문에서 장재민의 회화에 대하여, “기억에 기반한 현실의 풍경을 그려왔던 장재민은, 뜻밖에도 더욱 노련해진 붓질을 통해 형태를 구축하려는 충동 대신 대상을 지우고 뭉개버리는 극단적 상황으로 우회해버렸다”고 썼다. 이어서 그가 “자신의 그림 그리는 행위가 계속해서 형태를 망치고 다시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의 연속이라” 말했다고 덧붙였는데, 나는 그 과정을 통해 현실의 풍경이 마침내는 기억을 거쳐 “추상적인 붓질로 구체화” 되었음을 그 글에서 강조했다.[⟪직관⟫(2017. 학고재)] 현실의 풍경을 다시 기억하는 그의 행위가 그림에서 화면을 붓으로 지우고 망가뜨리는 행위와 동일시 되면서, 풍경의 구체적인 형상과 그렸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는 몸의 제스처가 서로 중첩되어 “본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애매한 간극을 회화로 나타냈다.
이제, 동일한 조건에서 바깥 풍경 대신 작업실 내부 공간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조건적인 함의와 어떤 결과적인 변화를 동반하게 될는지, 그의 그림에서 다시 살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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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1>과 <스튜디오 #2>(2022)는 그의 여느 풍경 그림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거리감이 단축된 듯 보이는 화면 안에 작업실 모습을 담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장재민은 먼 야산과 저수지처럼 자신의 몸으로부터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멀리 떨어져 있던 풍경에 대한 경험을 그리면서, 그 대상과의 거리감을 큰 붓질로 채워나갔다. 특유의 녹색을 머금은 회색 톤 화면에는, 풍경을 이루는 객관적 형태가 존재하기 보다는 풍경을 뒤덮은 회색 물감의 현존이 더욱 강하게 표현되곤 했다. 회색 풍경은 그림에서 현재의 시간을 소거하거나 공간의 위계를 흩트리는데 적합해 보였다. 자신이 마주했던 바깥의 거대하고 먼 풍경을 가져와, 그는 자신과 대상 간의 시공간적 논리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며 그 사이를 회화의 시각적 깊이로 변환시켜 놓았던 셈이다.
캔버스 위에서 붓을 다루는 그의 행위는, “회색 구름 속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그 유명한 초상화를 간혹 떠올리게 했다. 예컨대, 『작업실의 자코메티: 18일 간의 초상화(원제: A Giacometti Portrait)』에서 그 작업 과정을 가늠해 볼 수 있었던 <Portrait of James Lord>(1964)에 관하여, 자코메티가 회색 물감으로 수없이 망가뜨려 놓은 모델의 얼굴이 회화의 깊이를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실에서 모델을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리면서, 그는 그 상대에게 “자연에 작은 구멍 하나를 내야겠어요”라고 말한 후에 “(…) 모든 것이 줄어들었어요. 넓어 보였는데 더 이상 아무 것도 들어갈 공간이 없어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작은 구멍은 그의 몸이 통과하는 작가와 대상 간의 단축된 거리를 암시하며, 이는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한 회색 물감의 회의적 윤곽선에 의해 화면을 가득 채운 회화적 깊이로 전환된다.
이처럼 장재민은 그가 체험한 풍경을 미궁의 기억에서 길어 올려 구체적인 형상과 추상적인 제스처가 서로를 반영하며 수없이 충돌하는 회화의 궤적에 주목해 왔다. 그리고는 이 “기억”이라는 미궁의 작은 구멍을 굳이 가시적으로 절차화 하지 않고도 회화적 깊이로 나아갈 수 있다는 듯, 체험과 기억 간의 간극을 좁혀 그가 직접 그림 그리는 작업실 내부 풍경을 회화의 대상으로 가져왔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코메티가 초상화의 모델을 자신의 몇 발 자국 앞에 앉혀 놓았던 것처럼, 대상과 신체 사이의 재현 불가능을 증명해 주었던 합리적인 “거리”가 더 이상 둘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현실의 풍경 안에 (자코메티처럼) 자신의 신체가 통과할 임의의 “구멍”이라도 뚫어야 했을 테다.
장재민은 신체와 대상 간의 좁혀진 거리에서 회화의 깊이를 다루기 위해 공간을 둘러싼 “벽”에 집중했다. 그가 그린 <벽의 시간>(2022)을 보면, 작업실 내부의 벽을 지지체 삼아 사각의 평면들이 반복하며 붙어 있는데 이는 벽과 그림과 거울과 창문 등으로 연쇄하면서 화면과 마주하고 서 있는 몸을 향해 감각과 지각의 작용을 동시에 촉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로막힌 작업실 내부 공간의 벽에 주목한 장재민은, 그동안 “기억”이라는 여과장치를 통해 풍경의 형태와 시공간의 물리적 낙차를 그가 “본 것”과 “보이는 것” 사이에서 표상해냈다면, 이번에는 (기억이 아닌) “벽”을 매개하여 대상과의 관계를 새롭게 굴절시킨다. 이를테면, <벽의 시간>에서 형태를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 그 정체가 불확실해진 행위의 흔적을 살필 수 있는데, 그에게 벽 위의 사각 프레임 바깥으로 유령처럼 빠져나오는 회색 물감의 존재에 대해 나는 묻고 싶어졌다. 이 감각적 존재가 어떻게 그림 속에 등장하게 되었는가를 말이다.
전시 제목이 말해주듯, 장재민은 대상과의 거리가 좁혀진 공간의 폐쇄적인 상황에서 그림 그리는 자신의 감각을 재차 확인하여 “진흙”을 다루는 몸의 감각으로 추려냈다. 이때 과거의 회화사를 펼쳐보면, 수많은 도전을 이끌어낸 세잔(Paul Cézanne)과 자코메티와 베이컨(Francis Bacon) 같은 이들의 회화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과 그에 대한 사유를 그도 자연스럽게 참조하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진흙은 그의 회화에서 “색채”와 “형상”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회화적 깊이에 대한 특별한 함의를 지닌 은유적 매체로 호명된다. 진흙의 유동적인 물성과 습기를 머금어 깊이를 지닌 특유의 회색 톤은, 그가 체험한 지각의 대상을 캔버스에 옮기는 과정에서 “형상”과 “색채”의 감각적 실체로 전환하는 방식을 사려 깊게 설명해준다.
<Vinyl-Where Would I Be>(2021)로부터 시작한 실내 풍경 그림은 그가 대상과 관계 맺는 체험적인 감각을 일깨우는 분명한 계기가 됐다. 또한 대상뿐만 아니라, 그림 그리는 과정에서 매체를 다루는 감각으로의 전이를 실감하게 했다. 화면 앞으로 성큼 나와 있는, 어쩌면 사물을 눈 앞에 바짝 당겨서 세워 놓은 것처럼, 레코드 판 커버를 회색과 붉은 색 계열의 물감으로 그린 이 단순한 구도의 회화는 사실 그 대상에 대한 재현이나 화면 구성에 몰두하지 않는다. 회화적 깊이를 다루는데 있어, 일련의 “색채”와 “형상”이 공간 내부의 지지체와 물리적으로 결합하는 감각적 실체를 경험하도록 한다. 말하자면, 진흙을 이겨 어떤 지지체 위에 형상을 붙이고 질감과 양감을 만들 때, 그 행위를 벗어나 진흙 스스로 유동하며 “재료”와 “감각” 둘 다를 충족시키는 사태를 경험하는 일이다. 들뢰즈가 세잔과 베이컨에 주목해 “회화란 감각을 그려내는 것”이라 말했던 것처럼, 이는 은유적 매체로서 “진흙”을 매개로 하여 회화적 개입을 작가와 물질이 서로 주고받는 과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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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민은 작업실에 그림을 펼쳐놓고 완성을 유보하는 일련의 시간들을 보냈다. 작업의 모든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한 이 “유보” 혹은 “유예”의 순간은, 그가 말하는 “미궁에 대한 사유”로 이어졌다. 그 전제 조건은 “벽”이라는 가로막힌 공간에 의해 설정되었다. 마주하고 있는 그림들이 완전히 마르지 않은 진흙처럼 고정될 수 없는 형상들을 스스로 제 형태 안에 남겨 놓는 상황에 대응하여 그가 (이제 기억의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현존하는 감각을 가지고 개입하는 과정에 관해, 뭔가 그림 안에서 계속하여 튕겨져 나오는 것을 그의 그림 그리는 몸이 임의의 제스처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것이 “Muddy Bed”의 실체다.
<거울과 사람>(2022)이나 <그림과 사람>(2022)처럼, 작업실 내부 벽에 집중된 그의 그림에는 얕게 단축된 공간감으로 인해 거리감이 거의 소거된 회화의 표면을 보게 한다. 동시에 그 표면이 거짓말처럼 드러내는 회화의 깊이가 있는데, 그것은 그림 속 그림, 그림 속 거울, 그림 속 창문처럼 벽을 비추는 가로막힌 감각이 물감의 흔적을 주고받는 지속적인 관계에 의해 여지 없이 만들어진다. 그동안 바깥 풍경을 그려온 장재민의 회화는 그 현실의 거리감에 대한 기억이 가중돼 흐릿한 추상의 붓질로 현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신체와 밀착되어 있는 작업실 내부로 들어온 그의 회화에서 여전히 젖은 진흙처럼 형상을 유보시키는 흐릿한 붓질의 정체는, 그의 몸과 벽 혹은 그의 몸과 그림 사이를 오가는 형상과 제스처 간의 끝없는 힘겨루기에 달려있는 것일 테다. 마치 대상을 혹독하게 자신과 마주 앉혀 놓고 정작 수없이 많은 윤곽선으로 형태를 지우기에 바빴던 그 유명한 작가들의 역설처럼 말이다. “본 것”에 대한 회의와 그것 스스로 “보이는 것”의 가능성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장재민은 수없이 도전 받아왔던 역사의 그늘 안에서 새삼 “그림다운 그림”에 다가갈 현실의 경로를 모색했던 모양이다.
그림다운 그림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보면 단출하고 어떻게 보면 거대한 이 물음에 대해 생각하다가, 나는 발자크(Honoré de Balzac)가 소설 『미지의 걸작(Le chef d’oeuvre inconnu)』(1831)에서 가상의 등장인물을 통해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다가갔던 사유에까지 가 닿았다. 몇 세기를 거슬러 가 이 오래된 문학가의 사유를 좇는 이유는, 그가 형태의 내부와 형태의 이면을 강조하면서 회화에서의 “색채”에 집중한 여러 정황들이 있어서다. 장재민은 “그림다움”에 대해 사유하면서, 그림의 대상과 자신의 신체 사이에 주고받는 신체적 감각에 주목하고 이는 회화의 매체와 이를 다루는 신체의 제스처 간 힘의 교환을 물리적으로 현존하게 하는 회화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이때, 색채와 형태와 제스처는 서로를 반영하며 호환하는 관계 안에 놓여 있으며, 이를 “진흙”이라는 은유적인 매체가 물리적으로 매개한다. 발자크는 회화가 “육체 위를 구름처럼 떠다니는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고 했는데, 장재민의 경우 그림다운 그림의 사유 안에서 회화의 대상과 매체와 제스처 같은 각각의 (육체적) 현존을 오가며 실존적인 물성을 지각하고 감각하게 하는데 있다.
이번 개인전 ⟪Muddy Bed⟫는 두 개의 층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하나에는 작업실 내부 공간에 주목한 그림들이 설치됐고 다른 층에는 바깥 풍경을 그린 그림들이 걸렸다. <만조 시간>(2022)이나 <돌 사람들>(2022), <바닷가의 나무>(2022)는 그가 내내 그려왔던 바깥 풍경의 소재들을 다루고 있으나, 눈에 띄게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먼 풍경들이 신체적 현존을 극대화 하며 익명의 시선들과 대면하기를 자처하고 있다. 마치 바라보던 풍경을 성큼 도려내 발 앞에 가져다 놓은 것처럼, 장재민은 바깥의 크고 먼 풍경마저 하나의 “벽”처럼 실존적인 대상으로 화면 안에 옮겨 놓은 셈이다. 이는 전시 공간의 특징을 그대로 활용해 어둠 속에 부유하듯 설치한 효과로 더욱 체감할 수 있을 텐데, 한편으로는 공간 안에 머무는 익명의 신체에게 일종의 “보이는 풍경”으로서 벽처럼 스스로 현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어둠 속에서, 가로막힌 감각이 동공을 열 듯 공기처럼 가득한 어둠을 서서히 걷어내면, 그림과 나 사이에 어떤 거리가 만들어지고, 이때 두께 보다는 제스처의 흔적이, 형상 보다는 풍경의 촉감이, 보려는 욕망 보다는 보이는 것에 대한 믿음이, 나의 신체 앞에 조금 더 가까이 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가 풍경과 캔버스 앞에서 겪었던 현상적인 경험은 부유하는 지지체에 진흙을 붙이는 현존하는 감각으로 변환되었고, 그것은 그림 속 형상과 그 위를 수없이 떠다녔을 신체 행위 사이의 힘겨루기로 그림다운 그림에 다가가려 했던 속내를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