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의동 보안여관
2017년 첫번째 기획전
< 과거의 점점 더 깊은 층 >
Increasingly Deeper Layers of the Past

전시기간/ 2017년 4월 12일 – 4월 26일(총 15일)
관람시간/ 11-18시
오프닝/ 2017년 4월 15일 오후 5시
장소/ 통의동 보안여관 1F,2F & B1942 (B1)
참여작가/ 강신대, 박경진, 양자주, 은주, 정윤석, 조은지

책임 큐레이터/ 창파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신현진
객원 큐레이터/ 박수지, 이현
주최/ 통의동 보안여관
후원/ 일맥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Period/ 2017. 4. 12 – 4. 26
Opening Hours/ 11am-18pm
Opening Reception/ 2017. 4. 15. 5pm
Venue/ Artspace Boan 1F,2F & B1942 B1
Artist/ Kang Sindae, Park Kyungjin, Jazoo Yang, Bless Zoo, Jung Yoonsuk, E.J.Cho
Curator/ Changpa, Park Suzy, Yi Hyun
Assistant Curator/ Aletheia Hyun-Jin Shin
Organizer/ Artspace Boan1942
Sponser/ Ilmac Cultural Foundation, Arko

키워드 & 작가 소개

키워드A/ 가족주의, 광기적 애국심, 집단으로의 호출

박경진

박경진 작가의 <훈련병>과 <반경 0Km #.10>은 무수한 사람 떼가 밀집해 아수라장을 형성한다. 서로를 죽일듯 잡아 뜯고 있지만 각각은 정체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닮아 있는 기이한 모습. 그에 반해 텅 빈 하늘이 캔버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반경 0Km #.18>에서는 공허함이 느껴지는 동시에 왼쪽 한편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원자력발전소가 미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정윤석

어두운 밤길을 배회하는 <먼지들>은 불안정하고 명료치 않은 시점으로 일상의 조각을 하나하나 주워 담는다. 훅 불면 힘 없이 날아가는 먼지들. 그러나 컴컴한 망각의 대지에서 먼지처럼 존재하는 기억의 파편들은 연약하지만 응축된 힘을 보유한다. <별들의 고향>에서는 지난날 한국사회 풍경의 여러 단편이, 산업화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음악을 배경 삼아 회상처럼 스쳐 지나간다.

키워드B/ 부유하는 깃발, 현재적이고 기묘한 기표들의 그물망

강신대

강신대 작가의 <0416 실시간>은 인터넷 수집 알고리즘으로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이미지를 전시 기간 동안 발굴하고 실시간으로 중계하며 집적해나간다. <본격 시대정신 밴드 컨템포러리 – 인터내셔널가(하즈X펄펄Ver.)>에서는 민중과 혁명의 정신마저 소비되고 마는 시대적 오류와 상실해가는 역사의 과거로부터 어떠한 미래도 도래할 수 없음을 읊조린다.

양자주

양자주 작가의 는 재개발의 논리로 생성된 도시의 폐허 공간에서 파편을 채집하고 캔버스에 배열한다. 폐기물로 전락되어가는 파편들은 폐허의 흔적으로, 건축의 부산물로, 삶의 기억이면서도 회화로 여러 시선 속에 다르게 읽힌다. 7차 촛불 집회에서 시민의 촛불들이 함께 참여한 <dots, candles=”” 2016=””>은 동시대적 개별 주체의 발언을 그러모은 미시 정치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키워드C/ 지하생활자의 목소리, 블랙코미디

조은지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익살꾼 조씨의 투쟁사를 들어보았는가. 만약 <당신이 분노로 떤다면>, 체 게바라에 버금가는 정도의 진정한 투쟁에 동참해 지름 5mm보다 작은 돌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돌에 맞은 이가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만약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크고 작은 폭력들 앞에서 고함조차 지를 수 없다면 홀로 <누가복음 23:34>을 중얼거리기라도 해야한다. 이것은 조씨가 견뎌낸 발화의 역사다.

은주

은주 작가는 불특정 다수의 ‘봉기’를 재료로 기존의 봉기들을 발굴하고, 작가 스스로 그 봉기들이 위치한 일상의 장소들을 횡단한다. 혁명은 언제나 “혁명을 셀프로 합시다!”라며 ‘비혁명적 주체’들을 계몽해왔다. 반면 봉기만이 가질 수 있는 비강제적 성격은 몸을 이동시키는 체화된 행위로서의 ‘셀프’를 도모한다. 히로세 준의 말처럼 “문제의 해결로 피로를 보상받는 혁명과는 다르게 봉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를 떠안고 피로를 느끼는 과정”이다.

광장의 촛불과 가까웠던 보안여관의 장소성을 기반으로 하는 이번 전시는 ‘일상의 정치적 풍경’이라는 미시정치의 시선으로부터 착안되었다. 통의동 보안여관의 책임 큐레이터 창파, 객원 큐레이터 박수지, 이현과 함께 진행된 이번 기획전은 ‘가상의 화자’라는 큐레토리얼을 갖는다. 가상의 화자인 ‘나’는 국민국가의 국민이자, 촛불을 드는 시민, 크고 작은 폭력에 저항하는 개인, 타자의 잠정적 이웃으로서 발화한다. ‘나’는 기억을 통해 세계와 싸우고 있으며, ‘나’의 기억은 수집, 서술을 통해 말 걸기를 시도하고 작가, 작품, 큐레이터, 관람객을 포개는 주체로 작동한다. 참여작가 강신대, 박경진, 양자주, 은주, 정윤석, 조은지의 작품들로 국가주의로부터 소멸된 개인에서 생활인들의 사소한 투쟁까지 현재적이고 기묘한 기표들의 그물망을 보여준다.

망각은 한밤중 낯선 길을 걷는 행위와 같다. 방황의 끝에 어딘가 도달할 것이라 가늠할 수는 있지만 장소도, 방향도 도무지 확실치 않다. 다만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으며 어딘가로 이어져 있을 길을 추적해나갈 뿐이다. 역사적으로 거대한 재앙을 맞닥뜨릴 때마다 우리가 강력한 대항책으로 내세운 무기는 언제나 ‘기억’이었다. 기억은 공동의 상징물이나 특정한 이미지, 집적된 자료 등의 형태로 현실에 잔존하며 매 순간 과거를 상기시켜주고, 우리는 기억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면서 망각에 저항해왔다. 개인이 기억을 회복하지 못하고 망각 앞에 무력해질 때 과거는 소멸하고 공동체적 관계는 단절되며, 재앙은 다시 한번 움을 튼다. 재앙의 발생과 무관하지 않은 자들, 혹은 재앙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면서 권력을 유지하기 바라는 자들은 우리의 기억하기를 저지하기 위해 두 가지 방편을 모색한다. 기억 제거하기, 그리고 재단하기. 전자가 3S와 같은 자극적인 매체를 노출해 정치적 무관심을 유발한다면, 후자는 보다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오랜 시간에 걸쳐 역사의 기억을 재편한다. 과잉된 애국주의를 주입하고, 자유롭고 개인적인 삶보다는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삶에 영광을 쥐어주면서 희생 강요를 정당화하는 식이다. 경제 부흥과 국가 안보라는 미명으로 호출된 개인은 부역자, 유공자, 호국영령으로 추대받는 과정을 통해 점차 자신의 고유한 삶을 잃어가고, 고난을 상투적인 불행쯤으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 시대를 몸소 겪은 이들 중 일부는 여전히 전체주의의 망령에 깃든 채 군복 차림으로 태극기를 흔들면서 애국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들이 국가의 붕괴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결국 그들에게 자유가 없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보다 국가가 만든 판타지에서 평생을 사는 편이 훨씬 덜 고통스럽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집적된 모든 것들은 잠재된 기억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나간 도시 공간, 삶이 머물던 장소, 개별 주체들이 그러하다. 도시는 과거의 스러져간 지층을 딛고 거리를 만들며, 거리는 이름 모를 이들의 흔적으로 뒤덮히고, 개인은 잊혀짐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한 채 연속적인 새로운 순간들로 채워진다. 이처럼 혼재된 시공간은 기억의 파편덩이로 이루어진 깊은 층을 갖고 있다. 누군가 집요하게 기억을 붙들고 깊은 층을 파헤치는 행위는 쉬이 매몰돼버리는 것들로부터 기억을 상기시키고 이를 현재의 시간 안에 놓이도록 한다. 그렇게 수집되는 기억은 각자의 일상에서 다르게 집적되어 간다. 역사는 특별한 대상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왔지만 우리가 경험하고 기억하는 이야기들은 결국 개별 주체로부터 발화하는 미시의 정치다. 개인의 세세한 기억은 각자의 주체성을 간직한 채 일상에서 사회적 장소로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타자와 충돌하며 다르게 쓰여지는 것이다. 즉 일상에서의 미시적 발굴은 망각의 과정에 있던 과거의 잔해들과 파편을 동시대의 장소로 떠오르게 하고, 사회적 시각에서 다시 바라보게 하는 유의미한 발언이다.

벤야민은 과거에 다가가고자 할 때 발굴 작업을 하는 것과 같이 지층을 더듬고, 발굴하고, 파헤치면서 기억의 파편을 현재로 끌어올릴 것을 강조했다. 깊은 층 아래 잔존하고 있던 불연속적인 기표들과 과거의 잔해들, 기억의 파편들로부터 일순간 상기reminiscence 하는 것, 그래서 망각의 역사에 맞서 기억하도록 호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점점 더 깊은 층으로부터의 발굴이다. 이미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수많은 재앙에 대처하는 일은 어느 순간 개인의 몫이 되었다. 미끄러지듯 빠른 속도로 스러지는 도시, 그리고 삶을 파괴하는 소소한 재앙의 틈에서 부유하는 개인들은 홀로 세운 깃대를 드높여 미끄러지더라도 계속해서 기억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기록해 나가야 한다. 기억하려 하나 실패하고, 떠올리려 하나 사라지고, 살아남기에 낙오하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일상으로부터 자유로이 부유하는, 실낱같고 깨알같은 삶의 정치를. 이러한 생의 순간을 담보로 나부끼는 깃발을 끌어올려야 한다. 비록 찢어지더라도 멈추지 말고.

‘나는 왜 사소한 일에 분개하는가’라고 자문하는 것은 소위 대의적이거나 공적인 문제에 대한 저항의 결핍을 부끄럽게 여기는 탓이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이 느끼는 고통의 크기를 쉽게 가늠하기 어렵듯이, 분노의 정당성에 위계를 매기는 일이란 때때로 터무니없다. 더불어 크고 작은 고통과 재난들은 어떻게든 서로 연계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사소해 보이는 저항이라고 해서 부끄러워 해야만 할 일은 아닌 셈이다. 어쩌면 각자의 위치에서 저마다의 저항을 가시화할 때 비로소 언어는 발화력을 갖는다. 희한하게도 “사회의 도덕적 공황이 심화될수록 두려움과 불안은 구체화되며 대중은 그 원인 대신 내부의 ‘공공의 적’에게 모든 탓을 돌린다”던 제프리 윅스의 말처럼 개별 주체, 특히나 사회적 일탈자들의 언어는 소외되거나 오히려 공공의 제물이 되어왔다. 게다가 사회적 합의consensus로 무장했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는 저항이, ‘사사롭다고 여겨지는’ 저항을 묵인하는 일도 왕왕 벌어진다. 이견dissensus을 없앤 매끈한 공동체가 그 자체로 일종의 폭력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활인으로서 개인들의 투쟁은 어떤 모습일까? 그 생활인이 주류가 요구하는 기준에 못미치는 ‘미인간less than human’으로 명명되는 사람이라면 어떤 목소리를 지녔을까? 들어줄 타자를 담보하기 어려울수록 중얼거림이나 비명이 될 가능성이 크다. 때로는 조소, 비소, 냉소, 자조를 넘나드는 웃음소리일 수도 있다. 그러니 내가 먼저 그들의 죄를 사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사과 받을 길 없는 폭력들 앞에서, 기억을 되살려 익살을 부린다는 것은 얼마나 고단한 일인가. 과거를 소급하게 되는 오래된 분노는 최소한 미래를 지향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과거의 점점 더 깊은 층위를 발굴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현재적이다. 이는 이미 눈 앞에 펼쳐진 재앙에 가까운 현실을 재현하거나, 그 현실의 이면을 발굴하거나, 기존의 권력적인 인용을 재인용하는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재현, 발견, 패러디, 전용이라는 일련의 과정들을 거친다는 차원에서 이 행위는 이미 미학적일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정치적인 것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다만 일시적이더라도 중얼거림, 비명, 웃음의 파동이 공명할 공간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정치가 의미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창파, 박수지, 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