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 개인전
《물 속의 돌》 서울전

  • 일시: 2023. 03. 11 – 04. 02
  • 오프닝: 2023. 03. 11 (토) 4PM
  • 퍼포먼스: 2023. 03. 11 (토) 5PM
  • 작가와의 대화: 2023. 03. 19 (일) 3PM
    (선착순 15명, 신청: stoneinthewater.seoul@gmail.com)
  • 장소: 아트스페이스 보안 1
  • 운영시간: 12:00 – 18:00
  • 매주 월요일 휴관
  • 입장료 무료

YIDAHN’S SOLO EXHIBITION
Stone in the Water: in Seoul

  • Date : 11. Mar. 2023 – 2. Apr. 2023
  • Vinissage: 11. Mar. 2023 4PM
  • Opening Performance: 11. Mar. 2023 5PM
  • Artist Talk: 19. Mar (Sun) 2023 3PM
    (max.15 participants, register only: stoneinthewater.seoul@gmail.com)
  • Venue : ARTSPACE BOAN 1
  • Hours : 12PM – 6PM
  • Closed on Mondays
  • Free Admission

크레딧

▪ 주최·주관: 이 단
▪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2023년 예술창작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
▪ 사진, 영상 촬영: Vishnoir Kim
▪ 사운드작업 & 오프닝 퍼포먼스 협업: Cat Woywod
▪ 비디오 퍼포먼스: Jerry Gordon, Yangjah
▪ 인터렉티브 프로그래밍 & 기술도움: 김호남, 현승철
▪ 인터뷰 제작: Stephan Haberzettl
▪ 평문: 김일기
▪ 작가와의 대화: 김언정
▪ 설치 지원: 무진동사
▪ 영상설치 지원: 박도윤
▪ 기록: Andreas Gärtner(사진) , Markus Kiefer(영상)

THANKS TO:
진소클럽
이현진
반효원

SPECIAL THANKS TO:
용기를 주신 모든 분들
암투병을 겪어온 분들 및 그 주변분들
그리고 당신들

Credit

▪ Supported by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 Photos & videos by: Vishnoir Kim
▪ Soundworks & performances: Cat Woywod
▪ Video performance: Jerry Gordon, Yangjah
▪ Interactive programming & technical support: Honam Kim, SeongCheol Hyun
▪ Interview: Stephan Haberzettl
▪ Critic: dear Dairy
▪ Artist talk: Kim, Eunjung
▪ Installation support: Mujindongsa
▪ Video art installation support: Doyoun Park
▪ Documentations: Andreas Gärtner(photography), Markus Kiefer(video)

THANKS TO:
Jinso Club
Hyun Jean Lee
Hyowon Ban

SPECIAL THANKS TO:
Everybody who has encouraged and supported my cancer fight
& all people who’s been through cancer fight and those around them
AND YOU surviving everyday

상처는 빛이 들어오는 곳이다. The wound is the place where the Light enters you.”

– 루미Rumi 

이 단은 10년째 독일에 거주하며 작업하는 학생-작가다. 그리고 암 생존자다. ‘팬데믹’ 시기에 ‘이역만리’에서 ‘암투병’이라는 삼중고를 겪고 그 지난한 여정을 소재로 작업한 ≪물 속의 돌≫을 들고 서울을 찾았다(본 전시는 2022년 독일 카셀의 후게노텐하우스에서 열린 같은 이름의 개인전과 카셀 도쿠멘타15에서 선보인 작업들을 바탕으로 기획되었으며, 사진과 여러 자료, 오브제, 비디오,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로 구성된다).

크고 작은 사진 이미지들이 절단, 봉합, 파괴, 복구가 일어나고 있는 작가의 몸을 가감없이 보여준다(<겨울이 오면>). 항암은 다분히 폭력적인 치료다. 독(한 )약이 몸에 퍼지는 동안 통증과 신열에 시달리고 이따금 정신이 들면 도둑맞은 현재가 서럽다. 치료가 진행될수록 몸은 엉망이 된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가슴은 잘리고 피부는 그을고 딱딱하게 갈라진다. 전시장 바닥에 나뒹구는 머리카락, 케모포트, 붕대, 굳은 피, 빈 주사기, 약 포장지 등이 여지없는 증거물로 제시되며 고통스러운 현장을 소환한다(<봄이 오면>). 드로잉 한 점이 무심히 걸려있다. 검게 뭉개진 형태를 비집고 물끄러미 이쪽을 쳐다보는 둥근 눈에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내 것인지 네 것인지 알 수 없는 고통이 공기 가득 스민다. 

이 단은 개인의 차원에서 질병의 아픔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전시장 곳곳에 세금정산서류, 보험서류, 체류허가증, 통계자료 등을 나열함으로써 개인의 투병과 연결된 사회적 맥락에 접근한다. 개중 압권은 추방통지서다(<그들의 방법>). 암투병으로 졸업이 미뤄진 유학생에게 외국인청은 최후통첩을 날린다. 당장 졸업을 하든지 아니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What have you done? 지금까지 뭘 한 겁니까?” 채찍질은 내면화되어 영혼을 할퀸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야.” 추방통지서와 나란히 걸린 정신과의사의 진단서는 당시 그녀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상태였는지 적시하고 있다.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이 내몰렸고 선택지는 많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시청 앞에서 두 팔을 벌려 항의시위를 벌이는 그녀의 영혼은 어느새 우아하게 날이 서있다. 

2018년 이 단이 암 진단을 받기 전 일이다. 카셀 중앙광장에 설치된 다른 이방인 작가의 오벨리스크가 극우세력의 농간으로 기습 철거되는 일이 벌어졌고 이에 분개한 이 단은 분필을 들고 광장으로 나갔다(<오벨리스크 다시 쓰기>). 그리고 오벨리스크가 사라져버린 돌바닥에 엎드려 오벨리스크에 쓰여 있던—오벨리스크와 함께 내쳐진—성경 구절을 자기 문장으로 바꿔 쓰기 시작했다.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가 나를 그늘로 몰아내었다.” “I was a Stranger and You drove me to the Shadow.” 지나가던 시민들과 이방인들도 기꺼이 이 퍼포먼스에 동참했다. “I was a Stranger and ____________________” 세상의 모든 언어로, 저마다의 아픈 경험으로, 새로운 문장으로 빈칸이 채워졌다. 

너희는 …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마태 25:35)

이 단은 개인의 상처와 아픔을 공론화하여 공동체의 지향을 환기하고 연대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그러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어조와 내밀한 분위기를 놓치지 않는다.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매달 하나씩 모은 감자 100개와 2018년 교통사고로 다친 상처가 아무는 100일 간의 사진 기록을 병렬 배치한 <100일과 100달>에서는 별스러운 자기애마저 읽히는데, 감히 이것은 고양된 자기애, 비범한 자기애라 할 만하다. 너나없이 누구도 혼자 아프게 놔두지 않겠다는 집요한 의지와 행동력이 이미 이때부터 싹트고 있던 게 아닐까. 이 단은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고 또한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한다(). 외로움이 다른 외로움에게 곁을 주면서 그렇게 더 나은 세상의 물꼬가 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독일의 겨울은 길고 춥고 흐리다. (2월에 해가 나온 게 딱 여덟 번이다!) 이 단은 해가 나면 어김없이 발가벗고 투병의 과정을 단계별로 박제했다. 그 용기와 스스로에 대한 곡진한 믿음이 가상하고 경이롭다(<해가 나면>). 작가의 알몸이 커다랗게 프린트된 반투명한 얇은 천 여덟 장이 압도적인 시각 효과를 형성하며 넘실거린다. 우리는 천과 천 사이를 거닐며 눈에 보이는 것 너머로 진입하고, 흩어지고 중첩되고 완성되는 이미지의 보이지 않는 일부가 된다. 병든(망가진) 나와 건강한(소생한) 나는 서로를 말없이 응시한다.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 내게도 벌어진 것뿐이라는, 단순하고 아픈 진실이 서리서리 풀려나온다. 그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곳을 향해 가고 있을 뿐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너는 내가 되고 나도 네가 된다.

전시의 말미에는 독일에서의 첫 자화상과 최근 자화상이 병치돼 있다. 첫 자화상은 이방인의 소외를 재치 넘치게 고발한 <물체화 Objectification> 연작(2016- )의 일부다. 흰옷을 입고 얼굴에 흰 칠까지 한 작가는 마치 투명인간처럼 존재감 없이 흰 벽에 흡수되고 있다. 그와 대조적으로 최근 자화상 <그들의 방법>(2021)에서는 검은 가면과 드레스를 입고 망가지고 타버린 가슴을 오롯이 노출하고 있다. 가슴의 상처는 이제 그녀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뒤로는 배신에 대한 형벌로 석조건물을 떠받치게 됐다는 카리아티드가 보필하듯 서있다. 주눅든 이방인은 이제 없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 그리고 질병으로 인한 배척과 소외를 정면으로 견뎌내고 마침내 각성에 이른 “호모사케르Homo Sacer”(절대 폭력에 노출된 벌거벗은 생명)는 마침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또 다른 ‘나’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함으로써 호모사케르의 사회적, 정치적 권리가 비로소 회복되는 순간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단은 언제나 뭔가에 달떠 있어서 가만히 있을 때조차도 조금은 소란스러운 모습이다. 씩씩한 걸음걸이로 다가올 때면 이 사람의 어제와 오늘, 내일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느낌이다. 한없이 여린 속내를 지녔지만 무한히 용감하다. 부당한 일에 분노하고, 지치지 않고 싸운다. 관습이나 관행에 가로막히지 않고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집중한다. 그녀가 관심을 기울이면 멋진 생각이 흘러나온다. 그렇게 더 크게 웃고 더 많이 운다. 세상을 향해 엄지를 세우고 “나랑 **하고 싶은 사람 여기, 여기 붙어라!” 하고 외치는 것만 같다. 말 그대로 삶에서 작업을 길어 올리는 작가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은 결코 작품제작이나 전시활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술-삶의 경계가 모호하다 못해 무화되는 드물고 귀한 순간을 이 단에게서 본다. 

한국에서의 전시를 준비하느라 바쁘던 어느 날이었다. 이 단은 잠시 손을 멈추고 “엄마가 올 수 있을까?” 하더니 짐짓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미에게 자식의 고통을 어디까지 지켜보라고 할 수 있을까. 해가 다르게 작아지는 그 여인에게 차마 못할 짓은 아닐까. 고민이 깊을 것이다. … 그렇지만 아마도 이 단이 이 전시를 가장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바로 그녀의 어머니일 것이다. <부치지 못한 편지>에서 망설이며 지워버린 수많은 말 끝에 겨우 남겨진 그 한마디. 역설적이지만 끝끝내 전하고 싶은 진심은 어쩌면 정말로 그것 뿐이다. 

 “엄마, 나는… 나는 정말로 괜찮아요.”

김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