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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가자 보안여관으로_20190527

임지영의 예술사용법

가자 보안여관으로

 섬네일 이미지 임지영/ 나라갤러리 대표

 

오래된 것이 좋다. 고스란한 것들이 좋다. 세상의 속도는 너무 빠르고 풍경도 눈깜짝할새 달라져 있다. 옛날 사람인 나는 숨차게 쫓아가보지만 역부족이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뭐? 스피드가 아니라 우선멈춤. 날고 뛰는 이 먼저 보내고 은근슬쩍 뒤로 처진다. 가만가만 느릿느릿 걷는다. 되도 않는 속도를 내느라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던 땀방울이 쏙 들어간다. 때마침 불어온 오월의 밤바람이 미소에 무늬를 만든다. 이팝나무 잎사귀가 일제히 손을 흔들며 작고 흰 꽃잎을 나부껴준다. 배시시 초록빛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아빠는 오래된 것들의 수집광이었다. 우리집은 거의 작은 박물관을 방불케했다. 모양도 각각에 어느 시대인지도 모를 토기들부터 누런 한지의 얼룩이 그대로인 양반 도령의 서책, 조선시대 문인화가들의 춘하추동, 매난국죽 병풍들부터 박목월 첫시집 <산도화>의 첫1쇄판에 이르기까지. 케케묵은 오래된 잡동사니들의 수장고 같았다. 어린 내 눈엔 그리 보였고 처음엔 딱히 그것들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냥 주어진 환경이고 일상이었으므로 오래된 풍경 속에서 뒹굴거리며 자랐다. 그런데 오래된 그림들에는 오묘한 온기가 있어서 그앞에선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아주 아득한 옛날 사람들의 삶이 코앞으로 훅 다가오며, 인생은 금방이고 역사는 지금이야 은근하게 위로했다. 나는 오래된 것들이 주는 깊음을 알아차렸고, 그들이 보내는 따뜻한 위무를 점점 더 좋아하게 됐다.

삶의 어느 시절은 너무 빠르다. 새로운 일, 벅찬 사랑, 늦은 공부,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겅중겅중 시간이 마구 달릴때가 있다. 나는 2번이고 싶지만 3번. 빠르고 바쁘게 사느라 숨이 차고 있었다. 늦은 밤 수업이 끝나고 가쁜 호흡을 고르며 서촌으로 달려갔다. 통의동 보안 여관으로 한밤의 전시를 보러갔다. 1942년 세워진 보안 여관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 채, 그 안에 미술관을 만들었다. 적산가옥의 골조를 그대로 살렸고, 낮은 천장과 좁은 복도, 삐걱이는 나무 계단, 깨져나간 타일, 대나무 그늘이 일렁이는 뒷마당까지 오래된 시간이 그대로 전시되고 있다. 물론 그 오래되고 놀라운 공간에서는 신진 작가들의 <호랑이의 도약>전이 열리고 있었다. 작은 방방마다 젊은 예술가들의 팔팔한 예술혼이 가득했다. 완벽한 신구의 조화였다.

오랜만에 그 웃음이 나왔다. 오래된 웃음. 삶에 무늬가 아로새겨지는 편안하고 따뜻한 웃음. 보안 여관의 칠이 벗겨진 황토색 나무 문짝에 가만히 손을 대본다. 역사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하다. 70년도 훌쩍 넘기도록 그곳의 주인장이, 손님들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여닫았을 문. 그들의 삶도 부지불식간에 여닫혔을터. 지금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이 웃다가 울다가 뛰다가 걷다가 멈추었을터. 마음이 한없이 순해지고 선해진다. 지금 필요한 건 뭐. 느린 웃음과 맥주 한 잔. 전시장 입구에 붙어있는 오래된 보안 여관의 첫간판까지 버리지 않았다고 대표님이 자랑하셨다. 보안 여관은 그 자체로 이미 역사의 설치 작품이었다. 나는 와아! 너무 대단하셔요! 진심으로 감탄하며 활짝 웃었다. 아빠에겐 못해드렸던 감탄이다.

나는 오래된 것들이 좋다. 집도 그림도 사람도 시간의 강을 타고 천천히 흘러가는 게 좋다. 오래되어 가면서 이야기가 생긴다. 케케묵어 가면서 역사가 만들어진다. 경복궁 영추문이 바로 앞이니 이곳은 정말 역사의 한복판이다.

얼마전 나와는 띄엄띄엄 간혹가다 마주치는 언니와 삶의 속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 언니는 아직 결혼도 안했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신나게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자주 걱정했고 우려섞인 시선을 보냈다. 늘 당당한 언니는 무심하게 툭 던졌다. 남들의 속도에 맞춰줄 필요 있나? 나는 내 삶의 속도대로 살고 있는데. 나는 지금 이게 내 생의 정속주행이야. 몇년간 엇갈리던 언니를 그제서야 딱 만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그 날 종일 삶과 사람에 대해 퍽 밀도있는 대화를 나눴다. 서로 울돌목같은 시간을 핑핑 돌다가 이제야 만난 것 같다며 함께 웃었다. 한결같은 사람들이 오래 만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기의 속도로 살아가다가 어느날 불현듯 마주쳐 손을 잡는다. 오래되어 깊은 위로를 주는 것들처럼 오래 만나 웃음이 익숙한 사람도 그렇다. 앞으로도 오롯하게 함께하며 보안 여관처럼 근사하게 오래되어 가고 싶다. 든든하게 한 자리를 지키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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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보안여관 최성우 대표님[임지영 나라갤러리 대표/ <봄말고 그림>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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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링크 : http://uberin.co.kr/view.php?year=2019&no=354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