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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아서 새롭다… 오빠, 정미소에서 아포가토 한잔

고속 성장이 끝난 시점, 성장의 군불을 지폈던 제조업이 사양 산업이 됐다.
유휴 시설은 늘었는데 무조건 뚝딱 허물고 짓기엔 비용이 부족하다.
‘문화’라는 산소호흡기를 달아 죽은 공간을 살리는 방법이 자연히 주목받게 됐다.

김미리·강정미 기자  편집=김현중

네모 반듯 새하얀 미술관, 지역 불문 천편일률적인 프랜차이즈 카페는 이제 지겹다? 여기, 옛 모습 간직한 세상에 둘도 없는 공간들이 있다. 오래된 붉은 벽돌, 배관이 훤히 드러난 세월 묻은 천장 아래 개성 만점 문화 공간이 펼쳐진다. 가동 멈춘 공장에서 날것 그대로의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을 만끽하며 커피 마시고, 대중목욕탕의 추억을 떠올리며 패션을 즐긴다. 손엔 첨단의 스마트폰을 쥐고 있지만, 발 딛은 곳은 먼지 폴폴 날리는 옛 건물이다. 오래된 건물에 새로운 이야기를 입혀 사람들의 눈과 발길을 사로잡은 공간들을 찾아봤다.


문화가 되살린 옛 공간…
100년 된 병원은 카페로, 목욕탕은 안경 매장으로

‘0’과 ‘1’, 두 숫자로 구축된 이진법의 디지털 세상은 참 매정하다. ‘Delete’ 키 하나면 오래된 추억도 흔적 없이 사라진다. SNS 타고 낯선 이와 선뜻 ‘친구’ 맺지만 키보드 몇 번 두드리면 인스턴트 우정은 말끔히 정리된다. ‘후’ 불면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가상 세계에 대한 반작용일까. 요즘 오랜 시간 쌓인 낡고 허름한 공간이 인기다.
몇 해 전만 해도 당장 용도 폐기됐을 법한 오래된 건물이 제 빛깔 그대로 머금은 채 새 용도로 쓰인다. 온탕, 냉탕 그대로 남겨둔 목욕탕이 선글라스 가게로 탈바꿈했고, 컨베이어 벨트 설치된 신발 공장이 카페가 됐다. 당구장이 젊은 예술가들의 전시 무대로, 소독약 냄새 짙게 밴 100년 된 병원이 카페로 바뀌었다. 서울만의 얘기가 아니다. 부산, 마산 등 한국전쟁 때 전쟁의 포화를 피할 수 있어 근대 건축물이 풍부한 지역에선 개성 있는 공간 재생(再生)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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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과자 공장이 대형식품매장으로 변신한 뉴욕 첼시 마켓. /강정미 기자

공간 재생 붐은 10여 년 전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됐다. ‘오레오’로 유명한 비스킷 회사 ‘나비스코(Nabisco)’에서 1890년대 지은 공장 28개의 벽을 터 만든 뉴욕 미트패킹의 ‘첼시 마켓’, 낡은 양조장을 문화 공간으로 바꾼 런던 브릭 레인 지역의 ‘올드 트루먼 브루어리’, 문 닫은 ‘티센’ 제철소를 생태 공원으로 바꾼 독일 ‘뒤스부르크 환경 공원’ 등이 대표적이다. 처음 국내에 이런 사례가 소개될 때만 해도 이 빠진 그릇은 곧 액운이요, 신발 자국 하나 없는 반질반질한 신축 건물을 최고로 치던 한국엔 낯선 풍경이었다. 녹슨 철제 선풍기 윙윙 돌아가는 낡은 공장을 매장으로 쓰다니!
그랬던 우리가 변한 이유가 있다. 우선 ‘저성장’이다. 고속 성장이 끝난 시점, 성장의 군불을 지폈던 제조업이 사양 산업이 됐다. 유휴 시설은 늘었는데 무조건 뚝딱 허물고 짓기엔 비용이 부족하다. 돈을 적게 들이면서 버려진 공간을 근사하게 활용할 필요가 생겼다. ‘문화’라는 산소호흡기를 달아 죽은 공간을 살리는 방법이 자연히 주목받게 됐다. 유럽과 미국의 재생 시설이 18~19세기 산업화를 일궜던 산업 시설이었다면 우리는 1960~1970년대 도시화, 산업화를 주도했던 공장들이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은 “공간 재생의 인기는 현실적으로 부동산과 건설 경기 침체와 맞물려 있다”고 분석한다.
높아진 문화 눈높이도 낡은 공간의 유행을 이끌었다. 해외에서 빈티지를 익숙하게 경험한 유학파와 여행족이 많아져 유행의 시차가 없어졌다. 우리 것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 덕에 목욕탕, 당구장 같은 서양에선 보기 드문 독특한 재생 공간까지 등장했다. 먼지 뽀얀 낡음은 이제 멋스러운 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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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차고지의 옛모습을 간직한 카페 브라운핸즈 마산점. 왼쪽 작은 사진은 과거의 버스차고지 모습이다. /류열 영상미디어 기자·브라운핸즈 제공


공장 대문이 테이블, 컨베이어 벨트가 카운터…
낯선데 친숙하네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쓰는 카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것 같아요.”

부산시 동구 초량동 ‘브라운핸즈백제’(051-464-0332)에 들어선 사람들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지난 3월 문을 연 이곳은 디자인회사 브라운핸즈(Brownhands)가 1922년에 지어진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종합병원인 옛 백제병원(등록문화재 제647호) 1층을 개조해 만든 카페다. 붉은 벽돌을 쌓아올린 외관과 내부의 목조 계단이 옛 모습 그대로다. “세워진 지 100년이 다 된 건물에 직접 들어와서 커피도 마시고 사진도 찍을 수 있는 것이 신기해요.” 직장인 최유미(30)씨 얘기다.
브라운핸즈는 가구, 조명, 손잡이 등 다양한 소품을 만드는 디자인 브랜드다. 흙틀을 이용한 전통주물방식을 고집하는 브랜드 이미지를 위해 차량정비소, 버스차고지, 근대건조물 등 옛 공간을 활용해 쇼룸이자 디자인카페로 꾸몄는데, 세간엔 카페로 더 유명해졌다. 2년 전 디자인카페로 첫 선을 보인 ‘브라운핸즈 도곡점’(02-572-0332)은 오래된 자동차정비소를 활용했다. 박진우 대표는 “강남의 빌딩숲 사이에서 자동차정비소를 발견하고 ‘이곳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인위적인 느낌보다 건물 자체를 살리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골조를 보강하긴 했지만 바닥이나 벽면, 외관까지 옛 모습 그대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촬영지로 더 유명해졌다. 반줄카페 장면을 여기서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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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합정동 신발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는 앤트러사이트 합정점의 카운터가 됐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기자

‘브라운핸즈 마산점’(055-243-0050)은 버스차고지를 개조한 카페다. ‘안전제일’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라는 글자가 그대로 남아 있는 옛 건물과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테라스가 색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김기석 디자인실장은 “기존 공간을 활용하는 것이 오히려 새로 짓고 만드는 것보다 시간과 비용이 더 많이 들 수 있어 오래 고민하고 공을 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브라운핸즈 외에도 낡은 곳을 카페로 개조한 공간이 많다. 서울 합정동의 ‘앤트러사이트’(02-322-0009)는 옛 신발공장을 개조한 카페다. 공장의 천장 골조가 그대로 보이고, 공장 대문으로 만든 테이블, 컨베이어 벨트로 만든 카운터가 산업 현장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원두는 1910년식 프로바트 로스터기로 직접 볶는다. 공간뿐만 아니라 커피에서도 오래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버터팻트리오’ ‘나쓰메소세키’ 등 주인장이 좋아하는 뮤지션과 작가 이름을 붙인 커피가 눈길을 끈다. 대학생 이유정(23)씨는 “획일화된 프랜차이즈 카페와 달리 개성 있고 낯설지만 친숙한 느낌이 좋다”고 말했다.
제주의 ‘앤트러사이트 한림점’(064-796-7991)은 전분 공장이었다. 공장에서 쓰던 증기터빈과 철, 돌을 그대로 놔뒀고 당시 있던 식물까지 그대로 뒀다.
서울 성수동 ‘대림창고갤러리 컬럼’(02-466-9000)은 주말이면 줄이 길게 이어진다. 성수동 공장지대 오래된 창고를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해온 대림창고에 갤러리와 카페, 레스토랑을 겸하는 공간이 지난달 문을 열었다.
앤트러사이트 김평래 대표는 “오래된 것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 이것은 시간(역사)을 되찾아오는 것이며 이러한 독창성이 사람들에게 어필한다”고 말했다.


간판은 옛날 당구장, 내부는 미술관…
편집숍으로 바뀐 봉제공장

한국 아닌 것 같아요, 이색 문화공간

서울 계동 골목길 터줏대감이자 TV드라마 단골 촬영지였던 ‘중앙탕’은 작년 5월 선글라스 전문 브랜드 ‘젠틀몬스터 북촌계동 플래그십스토어’(070-4895-1287)로 변신했다. 1969년부터 목욕탕으로 사용돼온 중앙탕 일부분을 보존하면서 ‘Bathhouse’라는 이름의 쇼룸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목욕탕 간판이 그대로 달린 매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진열된 선글라스를 보고 나서야 이곳의 정체를 알아챈다. 중앙탕 리모델링을 담당한 아티스트그룹 패브리커 김성조(34) 대표는 “탕의 원형은 그대로 놔두고 타일의 흔적을 살려서 이곳이 목욕탕이었다는 것을 최대한 살려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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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글라스 매장이 된 목욕탕(왼쪽), 미술관이 된 당구장. /장은주 영상미디어 기자·구슬모아당구장 제공

목욕탕을 활용한 사진 스튜디오도 있다. 성수동 ‘싸우나 스튜디오’(010-8605-6326) 옥상에는 아직도 목욕탕 굴뚝이 남아 있다. 역삼동에서 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하던 김성재(41)씨는 과거 목욕탕이었다가 창고, 구두 공장으로 쓰였던 이 공간을 스튜디오로 꾸미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지하에 암실을 만들어 오는 7월부터 흑백사진 강좌를 열 예정이다.
대림미술관 프로젝트 스페이스 ‘구슬모아당구장’(02-3785-0667)은 한남동 골목의 오래된 당구장을 전시장으로 바꾼 미술관이다. 당구장 이름을 그대로 둬 이름만 보면 미술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매년 다양한 분야의 젊은 크리에이터들을 발굴해 전시하는 실험공간이다. 이달 18일부터 8월 7일까지 그래픽 디자인·인쇄·출판스튜디오인 코우너스의 전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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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숍이 된 봉제공장, su;py 매장. /장은주 영상미디어 기자

성수동 대림창고 맞은편 인쇄공장 2층에 자리 잡은 ‘su;py’(02-6406-3388)는 오래된 봉제공장을 개성 있는 편집숍으로 꾸민 공간이다. 자체 제작하는 브랜드 ‘su;py’ 제품과 함께 이집트 핸드백 디자이너 브랜드 ‘ZAAM’, 프랑스 액세서리 브랜드 ‘TARATATA’ 등 80여 개 브랜드 제품을 만날 수 있다.
뉴욕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돌아온 이계창(34) 대표는 기존의 틀과 그걸 깨는 새로움이 공존하는 브랜드 콘셉트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공간을 찾던 중 이 봉제공장을 발견했다. “처음엔 여기서 무얼 할 수 있을까 막막했는데 천장 구조를 뜯고 보니 옛 공장의 골조가 남아 있어서 그걸 그대로 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매장을 방문하는 고객들은 ‘묘하다’ ‘재미있다’ ‘런던스럽다’ ‘신주쿠 같다’ ‘브루클린에 온 듯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대학생 이주은(24)씨는 “평범한 외관과 달리 대반전이 있는 곳”이라며 엄지를 치켜올렸다.
스타일리스트 한혜연씨는 “공장에서 런웨이쇼를 하고 발전소가 박물관이 되며 공중목욕탕이 숍으로 탈바꿈한다는 발상 자체가 기발하다”며 “개성 없고 돈만 들인 공간보다 삶의 흔적과 묘미가 녹아 있는 공간들에 힙스터들이 주목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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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통의동 보안여관. /보안여관 제공


서울 정동, 부산 초량, 군산항
20세기 간직한 근대 거리 투어

오래되고 낡은 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우리 근대건축물을 둘러보는 투어들도 인기다.

부산 초량, 개항부터 한국전쟁까지
브라운핸즈백제로 변신한 옛 백제병원은 1922년 지어진 근대건축물. 이곳을 시작으로 초량이바구길이 시작된다. 부산역과 마주한 초량동 일대는 개항 이후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부산 근현대사의 터전이 된 곳이다. 옛 백제병원부터 남선창고터~초량교회~김민부전망대~168계단~당산~이바구공작소까지 이 지역에서 청춘을 보낸 스토리텔러(이야기 할배·할매)와 함께하는 부산원도심스토리투어 ‘이바구길 걷다’ 프로그램이 대표적. 신청은 부산관광공사 홈페이지(bto.or.kr)와 전화(051-780-2175)로 하며 참가비는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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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핸즈백제(옛 백제병원) 외관. /류열 영상미디어 기자

전북 군산, 일제강점기 건물들 그대로
개항장으로 번성해 수탈의 아픔을 겪으며 만들어진 일제강점기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군산의 근대건축물을 알차게 둘러보려면 군산세관, 조선은행, 일본18은행, 미즈상사,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총 20곳을 방문해 스탬프를 찍어 완성하는 ‘군산스탬프투어’나, 임피역사와 신흥동 일본식 가옥, 동국사 등을 둘러보는 시티투어버스 ‘근대문화코스’를 이용하면 된다. 스탬프투어 책자는 군산시청 관광진흥과(063-454-3303)에서 수령 가능하며 시티투어버스는 홈페이지(tour.gunsan.go.kr)에서 사전예약 해야 한다.

서울 정동길, 구한말 역사를 품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신문로로 이어지는 정동길은 구한말 역사를 견뎌낸 근대문화유산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다 같이 돌자 정동 한 바퀴’는 덕수궁 중명전과 선원전 터, 구 러시아공사관,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구세군 중앙회관, 정동교회, 배재학당 동관 등을 해설사와 함께 둘러보는 프로그램으로, 매주 토·일요일 오후 1시 30분 정동극장 앞에서 시작된다. 신청과 문의는 문화유산국민신탁(02-752-9297)으로 하면 된다. 참가비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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