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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항신문_20110621

[e-세상 속 이 세상]서울의 근대 건축물들이 들려주는 ‘옛이야기’
글·사진 최예선 http://sweet-workroom.khan.kr
입력 : 2011.06.21 21:2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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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오오세 루미코와 함께한 서울답사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그는 제가 쓴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를 흥미롭게 읽었다며 연락해온 일본인 여성입니다. 일본인 독자로부터의 연락은 사실 뜻밖이었습니다. 제 책은 한국의 근대문화유산,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의 건물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으니까요.

오오세 루미코는 아시아 근대 건축물, 특히 1920~50년 ‘쇼와(昭和) 시기’의 건축물에 관심이 많다고 합니다. 일본은 문화유산 보호정책이 한국보다 발전해 있음에도 근대 건축물이 많이 헐려 나가고 있답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과 소셜네트워크 카페를 만들어 아시아 곳곳의 근대문화유산, 특히 일본의 영향을 받은 건물들을 찾아보는 중이랍니다.

원래 3월에 도쿄에서 만날 계획이었으나 동일본 대지진으로 무산되고 6월에 그가 서울을 방문했습니다. 대학로 카페에서 인사를 나누고 곧장 서울답사를 떠났습니다.

■ 자궁 형상화 ‘19금’ 건물

14:00, 동대문역사문화공원 3 번 출구 서산부인과

답사 장소들은 오오세 루미코가 정했습니다. 그는 2003년부터 서울에 3년간 살면서 후암동, 삼각지, 충정로 등지의 옛 건물과 거리들을 답사한 후 이를 서울 소개 사이트에 싣기도 했답니다. 우연히 거리를 걷다가 만난 오래된 건물에 새겨진 마름모꼴 장식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해요. 일본 쇼와 시대 집들에서 흔히 보이던 장식을 낯선 거리에서 발견하다니.

중구 신당1동 13번지 서산부인과는 김중업이라는 걸출한 건축가의 작품입니다. 둥글둥글한 유기적인 형태의 흰색 콘크리트 건물은 당시의 건물들과 분위기가 많이 다르죠. 건물 평면도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이쿠야. 완전 남성의 생식기 모양이더군요. 김중업 선생, 유머가 대단하셨던 분인 것 같아요. 건축가인 남편 얘기로는 자궁의 모양을 형상화한 건물이랍니다.

이 ‘19금’ 건물은 병원과 살림집이 함께 있는 파격적인 형태였는데, 이후 여러 상업시설들이 들어오면서 산부인과로서 기능을 잃었습니다. 지금은 간판을 떼고 내부도 리노베이션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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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최초의 아파트

15:30, 충정로역 9번 출구 충정아파트

중구 장충동1가 47번지 일대, 장충단길 공동주택에 들러 산업화 시기 한국의 주거를 엿봤습니다. 그리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5호선 전철을 타고 한국 최초의 아파트로 알려진 서대문구 충정로3가 250번지 충정아파트에 갔습니다. 자그마치 1935년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당시는 문화주택 열풍이 불어 너도나도 집 한 채 가져보는 꿈을 꾸던 시기였지만, 4층 짜리 집합주거건물이 처음 세워졌을 때 놀라지 않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당시 서울에는 일본회사 간부들을 위한 관사가 여럿 지어졌는데, 이 관사들이 후에 아파트라는 고층 집합주거를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관사가 아닌 임대주거 형태로 지어진 것이 ‘유림아파트’입니다. 도요타라는 건축가가 지었다고 해서 ‘도요타 아파트’라 불리기도 했는데, 지금의 이름은 충정아파트입니다. 주로 일본인들이 임차해 살았고, 최신 설비를 갖췄다고 해서 젊은 중산층이 선호했다는군요. 세 동의 건물이 중정(中庭)을 둘러싸고 모여있는 형태이며 중앙에는 급수탑이 높이 세워져 있습니다. 세월을 실감할 만큼 낡았지만 사람 사는 곳답게 햇살이 들어오는 곳에는 화분이 가득했습니다. 한국전쟁 후 1층을 올려 지금은 5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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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돌 크고 모양도 독특

16:00, 송월동 서울 기상관측소

경성측후소라 불렸던 종로구 송월동 1번지 서울기상관측소. 기상청은 보라매공원으로 이전했지만, 그래도 서울 기상관측소는 서울 날씨의 기준이 되는 장소입니다. 관측소 앞 잔디밭에 있는 진달래가 꽃을 피워야 서울에서 진달래꽃이 피었다 하고, 이곳에서 눈이 포착돼야 서울에 눈이 온다고 공식 발표한다는 말이죠.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기상업무가 시작된 것은 1904년입니다. 이는 주변 여러 나라와 기상정보를 공유한다는 의미이고, 여기에는 세계와 소통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경성측후소 건물은 1933년 신축됐습니다. 콘크리트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벽돌건물입니다. 흰 도료가 떨어져나가 내부 구조물이 드러난 부분이 있었는데, 검은색 벽돌이었어요. 벽돌이 요즘 것보다 크고 독특해 보였습니다.

근대 시기에는 벽돌건물이 많이 생겨났는데, 벽돌의 크기나 종류가 무척 다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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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신만 남은 러 공사관 터

17:00, 정동길

개화기에 공관이 밀집해 있던 정동길을 걸었습니다. 아관파천으로 잘 알려진 러시아 공사관 터. 한국전쟁으로 건물은 파괴되고 탑신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공사관 터는 파고라(햇빛을 가리는 지붕)가 놓인 공원으로 변신했더군요.

신아일보사 건물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는 명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덕수궁 중명전과 정관헌도 둘러보았습니다.

고종이 커피를 즐겼다는 사실, 손탁호텔을 운영하던 손탁 여사가 커피 시중을 들었다는 이야기, 역관 김홍륙이 고종 커피에 아편을 타서 독살을 기도했다는 이야기 등을 풀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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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갤러리로 사용

18:30, 통의동 보안여관

택시를 타고 통의동 보안여관으로 이동했습니다. 1920년대에 여관 건물로 쓰였던 2층짜리 주택인데, 중앙에 복도가 있고 양쪽에 방이 있지요. 지금은 여관이 아니라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어요. 통의동, 효자동은 옛집이 많고 카페나 갤러리로 활용되고 있어 둘러보면 좋을 만한 장소이지요. 이 지역과 더불어 건너편 통인동, 청운동을 경복궁 서편에 있다 하여 서촌이라고 부릅니다.

건축물은 삶과 떼어놓을 수 없듯, 우리가 지금 찾아다니는 옛 건물들도 현재 우리 삶과 결부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겠지요. 옛 건물을 보면서 우리 삶을 보고, 현재 속에서 옛이야기를 찾아봅니다. 그러고 보면 삶이란, 시간을 초월한 것만 같습니다.

 


■ 글·사진 최예선
■ 블로그 주소 http://sweet-workroom.khan.kr
글쓴이는 건축잡지 편집자로 일하다가 프랑스로 유학, 미술사를 공부했습니다. ‘오래된 풍경’이라는 블로그에 한국 곳곳의 근대 건축물 이야기를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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