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03560_20171025

한겨레: [덕기자 덕질기 3] 보안여관에서 밤송이를 팔았다_20171025

박종찬
방송에디터석 기자

“보안여관에서 도시농부 장터가 열려요. 선유아리농장도 재미 삼아 나와봐요.”

무더위가 한창이던 8월 말이었다. 농장 이웃인 ‘우보님’(우보농장 주인)의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다. 관리기를 빌려주고, 볏짚을 나눠줬으며 서툰 농사에 여러 도움을 받은 터였다. ‘세모아(세상의 모든 아마추어) 장터’는 도시농부들과 유기농 식재료로 상을 차리는 요리사들이 만나 여름작물을 나누고 요리하는 행사라고 했다. 가을 농사가 막 시작된 농장에는 배추, 무, 갓 따위 모종만 자라고 있었다. 장터에 내놓을 수확물이 별로 없었다. 농장 식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일주일 만에 감자 50여개, 마늘 20여개, 애호박 5개, 노각 20여개, 참외 2개, 대파 한단이 농막에 쌓였다. 공동밭 풀을 베다가 돼지 머리보다 큰 호박 두 개를 횡재했다. 상추, 깻잎, 호박잎 등 푸성귀는 모조리 거둬 꾸러미에 담았다. 그래도 소형차 뒷좌석을 다 채우지 못했다. 그나마도 좌판 장식용으로 챙긴 밤나무 가지가 반을 차지했다. 이게 팔릴까? 장터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지난 9월2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세모아 도시농부’ 장터가 열리고 있다.
지난 9월2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세모아 도시농부’ 장터가 열리고 있다.
지난 9월2일 ‘세모아 도시농부’ 장터가 열린 서울 종로구 통의동 보안여관 선유아리농장 좌판에 채소들이 전시돼 있다.
지난 9월2일 ‘세모아 도시농부’ 장터가 열린 서울 종로구 통의동 보안여관 선유아리농장 좌판에 채소들이 전시돼 있다.

서울 종로구 통의동 보안여관은 옛날식 여관을 복합문화공간으로 개조한 곳이다. 허름한 벽과 바닥에서 퀴퀴한 흙냄새가 났다. 시골 폐가와 다를 바 없었다. 호박 두덩어리를 맨 앞에 문지기로 세웠다. 푸성귀는 바구니에 담아 상자 위에 올렸다. 벽에 달린 전구에는 밤송이를 걸어 분위기를 잡았다. 생긴 대로 키워 볼품없는 채소들은 보안여관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농산물 좌판이라기보다는 아기자기한 전시회 같은 분위기였다.?“마늘이 너무 귀여워!” 손님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좌판을 벌인 뒤 1시간이나 지났을까? 마늘 다섯쪽과 참외 두개를 2천원에 팔았다. 감격적인 마수걸이,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점심 무렵 감자와 노각을 한봉지씩 4천원에 팔았다. 덤으로 고추를 한움큼 줬더니 손님이 1천원을 더 놓고 갔다. 밤송이는 최고 인기였다. 밤송이 처음 본다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만져보고 쳐다보고 인증샷 찍느라 바빴다. 급기야 밤송이를 사겠다는 손님이 나타났다. 파는 게 아니라고 했더니, 노각 두개를 집어 들며 같이 사겠다고 졸랐다. 결국 1천원에 팔았다.

지난 9월2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열린 ‘세모아 도시농부’ 장터에서 손님들이 밤송이를 구경하고 있다.
지난 9월2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열린 ‘세모아 도시농부’ 장터에서 손님들이 밤송이를 구경하고 있다.
‘세모아 도시농부’ 장터에 내놓은 선유아리농장의 채소들.
‘세모아 도시농부’ 장터에 내놓은 선유아리농장의 채소들.

대동강 물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 안 부러웠다. 호박과 늙은 애호박은 요리사들이 사갔다. 마지막에 감자와 노각, 애호박 등이 1만원에 떨이로 나갔다. 이날 총매출은 딱 5만원. 아리농장 첫 수익 창출이었다. 농작물을 키워서 팔았다는, ‘생산자의 자부심’이 뿌듯하게 올라왔다. 아마도, 밤송이를 판 대한민국 최초의 도시농부. 내 인생의 이력이 한줄 늘었다.

pjc@hani.co.kr
원문 링크: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6051.html#csidx66a86631b564a73a8e8a31d1f0936c4